박희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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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朴喜光
영어음역 Bak Huigwang
이칭/별칭 박상만(朴相萬)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구미시 봉곡동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김용만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박희광의 별명은 박상만(朴相萬)이다. 경주부윤 박수홍(朴守弘)의 10세손이며, 아버지는 박윤하(朴胤夏)이다.

[활동사항]
박희광은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8세의 나이로 부친을 따라 만주로 갔다. 16세 때 봉천성(奉天省) 남성자학교(南省子學校)를 졸업하고 오동진(吳東鎭) 휘하 통의부(統義府)에 자진 입대하여 6개월간 군사 훈련을 받았다. 임시정부의 지령으로 18세의 나이로 만철연선(滿鐵沿線)과 한만 국경 지대에 잠복하여 중국, 만주, 러시아 등지의 10여 개의 군사단체가 관동군(關東軍)의 진로를 봉쇄하기 위한 작전에 참여했다.

당시 일본은 한국인의 집단촌과 독립단체를 와해시키기 위해 재만조선인회(在滿朝鮮人會)를 조직하고 그 산하에 보민단(保民團)·일민단(日民團) 같은 친일단체를 만들었다. 친일단체 대표들을 암살하기 위해 대장 김광추(金光秋)와 대원 김병현(金炳賢)·박희광으로 3인조 특공대가 조직되었다. 당시 정갑주(鄭甲周)는 여순조선인회(旅順朝鮮人會) 서기로 있으면서 여순고등계 첩자로 악명이 높았는데, 1924년 6월 1일 밤 박희광은 정갑주 집의 대문에 사형 선고문을 붙이고 가족과 같이 환담하고 있던 정갑주를 사살했다.

1924년 6월 7일 정오에는 이용구(李容九)와 같이 한일합방에 앞장섰으며 재만조선인회 회장이란 미명 아래 보민단(保民團)을 조직하여 온갖 만행을 저지른 최정규(崔晶圭)의 집에 잠입하여 최정규의 장모·처·비서를 현장에서 사살했다. 최정규는 2층 책상 밑에 숨어 간신히 목숨을 유지했다는 후문도 있다.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의 수양녀 배정자(裵貞子)를 대련(大連)에서 암살하려다 실패했으며 일진회 회장 이용구를 암살하려다 실패하였다. 또 1924년 7월 22일 일본영사관에 폭탄을 투척했으나 불발되어 실패하였다. 그날 저녁 고급요정 금정관(金井館)에 침입하여 군자금으로 300원을 탈취해 나오다가 잠복해 있던 일본 경찰과 총격전이 벌어져 김광추는 현장에서 순국하고 김병현과 박희광은 체포되었다.

박희광은 관동청(關東廳) 지방법원에서 1심에서 사형을, 2심에 무기징역을 언도받고 여순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일본의 유인(裕仁) 천황 즉위 때와 황태자 출생 때 감형되어 1943년 43세로 출옥했다. 출옥 후 대련에서 동지 이성갑, 유하도와 같이 상해임시정부로 가려했으나 경계가 삼엄하여 가지 못하고, 부득이 고향으로 돌아와 44세의 만혼으로 문화유씨(文化柳氏)를 맞아 가정을 꾸렸으나 생활은 매우 궁핍하였다.

1945년 해방을 맞아 임시정부 요인들이 속속 귀국하자 죽첨장(竹添莊)으로 백범(白凡) 김구(金九)를 찾아가 그간의 경과를 보고했더니 위로금으로 2000원을 주면서 정부 수립 때까지 기다리라 하였다. 1949년 김구가 암살되자 아무도 찾아주는 이 없었고 너도 나도 애국자였다고 나서던 때였으나 박희광만은 묵묵히 옥중에서 익힌 재봉 기술로 양복 수선을 생업으로 살았다. 생활고와 심신의 괴로움을 달랠 길 없어 처가가 있는 왜관으로 이주하여 살면서 한때 천주교에 귀의하여 왜관성당에서 ‘시메온’이란 세례명으로 영세까지 받았으나 슬하에 5남매를 두고 상처하는 쓰라림을 겪어야 했다.

후일 관동성 지방법원 재판 기록이 게재된 1924년 9월 1일자 『동아일보』 기사가 동아일보 대구지국에서 발견되어 박희광의 행적이 입증됨으로써 뒤늦게 훈장이 수여되어 노후에 다소 보탬이 되었으나, 1970년 l월 20일 71세를 일기로 서울 원호병원에서 타계하였다.

[상훈과 추모]
생전인 1968년 3월 l일 건국훈장 국민장이 수여되었으며 타계 후에는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자묘원에 안장되었다. 1972년 선산군의 뜻있는 유지들의 발기로 박희광의 기념사업을 추진할 때, 박정희 대통령이 동상 건립비 100만 원과 ‘애국지사박희광선생지상(愛國志士朴喜光先生之像)’라는 친필 휘호를 내렸다. 사정이 여의치 못하여 10여 년간 진척되지 못하다가 1983년 9월 5일 구미문화원에서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구미문화원 사업으로 착수하여 1984년 8월 15일 기공식을 가지고 12월 28일 동상 제막식을 하였다. 동상은 금오산도립공원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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