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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200674
한자 高麗時代
영어의미역 Goryeo Period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구미시
시대 고려/고려
집필자 임삼조

[정의]

918년부터 1392년까지 고려왕조가 지속되던 시기 구미 지역의 역사.

[개설]

구미시의 ‘구미’라는 명칭은 조선시대 선산도호부 상구미면·하구미면에서 비롯되어 1914년 상구미면·하구미면이 개칭된 상고면·하고면이 구미면으로 통합·개칭된 데서 비롯되었다. 독립된 지방행정구역으로서의 구미시는 1978년 선산군 구미읍과 칠곡군 인동면이 통합되어 구미시로 승격되면서 성립되었고, 1995년에 선산군을 통합하여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고려시대에 구미 지역은 오늘날의 구미시 권역으로 볼 때는 선주나 일선현의 영역이었다.

[연혁]

918년(태조 1) 고려가 건국되었을 때 구미 지역에는 후백제의 일선군이 있었다. 이 일선군이 936년(태조 19) 일리천 전투를 계기로 고려가 후백제를 정복하고 후삼국을 통일할 때 고려의 영토가 되었다. 995년(성종 14) 일선군을 선주로 개칭하고 자사를 파견하여 백성을 통치하기까지는, 전국의 대부분 군현과 같이 중앙 정부가 직접적으로 지방을 통치할 여건이 성숙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일선군은 이 지역의 유력한 호족에 의해 통치되었다. 1018년(현종 9)에 상주 속현이 되었고, 1143년(인종 21)에 일선현으로 승격하면서 현령이 파견되고 해평군·군위현·효령현·부계현을 속군현(屬郡縣)에 포함했으며, 후에 선주로 다시 승격하여 지선주사가 파견되었고 고려 말까지 존속되었다.

[대표 인물]

고려시대 선주에는 삼국시대 신라 이래로 많은 민호가 거주하고 있었다. 역내의 서북-남서를 관류하는 낙동강을 낀 광활하고 비옥한 한 평야가 펼쳐져 있어 일선군, 선주, 상주 속현, 일선현을 거치는 동안 많은 유력 가문이 거주하였고 관인·학자·효자 등 명망 있는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다.

유력 가문에는 선산김씨, 일선김씨, 해평윤씨가 있었다. 인물에는 태조 후비 해양원부인(대광 선필의 딸), 성종 후궁 문화왕후(증시중 김원숭의 딸)가 있었다. 고려의 후삼국 통일이나 고려의 정치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에는 선필·김선궁·김훤술·김수·윤군정·윤만비·윤가관·윤석·김주·김제가 있었다. 문과 급제자에는 김득현·김한충·윤진·김남보·김천부·길재가 있었다. 효자에는 박영미가 있었다.

이 중 김주는 예의판서로서 명에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 중 압록강에 이르러 조선이 개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려에 절의를 지켜 귀국하지 않고 중국에 은거하였다. 김제는 평해군수 재직 중 고려가 망하자 동해로 은거하였다. 길재는 조선 태종의 간절한 출사 요청을 거절하고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켜 정몽주·이숭인과 함께 고려의 대표적인 충신으로 추앙되었다. 또한 길재김숙자 등 제자 교육에 열성을 다하여 김숙자로부터 김종직에 이어지고 이후 그 제자와 손제자에 의해 형성되고 발전한 영남사림파의 토대를 닦았다.

고려시대 구미의 이러한 인재 배출과 절의 앙양, 성리학의 전승과 육성은 조선시대에 그대로 계승되어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전해오는 말에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반은 일선에 있다”라고 기록할 정도로 구미가 문향으로 숭앙되는 기초를 다졌다.

[사회·경제]

구미는 선사시대부터 인간이 살기에 적합한 조건이 구비되어 있었다. 선사시대부터 인간이 거주한 구미 지역은 조선시대 말까지 지속적으로 민호가 증가되었다. 고려시대 구미의 호수, 인구 수, 전결 수는 사료의 미비로 알 수 없다. 그러나 조선 초기의 자료에는 1450년(세종 32) 이전에 1,002호(선산 809호, 해평 196호)와 9,170결의 토지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 구미에 민호·인구가 상당하고 토지가 넓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구미는 산악으로 둘러싸여 있고 낙동강이 관류하여 그 유역에 광활한 농경지가 조성되어 있어 농산물과 약초 등 특산물이 많이 생산되었다. 농산물에는 벼·보리·콩 등이 있었다. 특산물은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조선 초기에 해송자(海松子, 잣)·율(栗, 밤)·완초(莞草, 돗자리)·칠(漆)·시(柿, 감)·즉어(鯽魚, 붕어)·이어(鯉魚, 잉어)·백화사(白花蛇, 백사)·백복령(白茯苓) 등이 생산되었다고 한 것에서 미루어 볼 때 고려시대에도 이들 산물이 산출되었을 것이다.

[문화]

고려시대 구미에서 20여 명의 재상과 문과 급제자가 배출되었다. 국초에 관학인 향학이 설치되고 학관이 부임하여 지방 자제의 교육에 종사하였던 것으로 볼 때 유교문화가 발달한 것으로 추측된다. 또 구미는 삼국시대 신라 때부터 불교 초전지로 많은 사찰이 건립되면서 불교가 융성하였고, 고려시대에도 이러한 전통이 계승되고 국가의 숭불 정책 및 상하층의 불교 숭신에 따라 많은 사찰이 건립되는 등 불교가 융성하였다. 사찰에는 도리사·수다사·옥림사·진남사·대둔사·미봉사 등이 있었다.

[기타]

고려시대 구미는 경상도의 중앙에 위치하고 남해에서 서울로 연결되는 육로, 남해에서 안동까지 연결되는 수로, 경상도의 요충지인 경주·상주·안동·성주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러한 지역적인 특성과 관련되어 구미은 국방과 교통의 요지로 중시되었다. 외적 방어를 위한 산성에는 금오산성천생산성이 있었다. 고려시대에 봉수대와 역·원이 운영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구미 지역의 위치와 조선 초기에 다수의 봉수대와 역·원이 설치되어 운영되었던 것을 볼 때 다수의 봉수대와 역·원이 운영된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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