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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농민항쟁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200921
한자 善山農民抗爭
영어의미역 Peasant Movement of Seonsan
이칭/별칭 선산농민봉기,선산농민운동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권영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농민항쟁
발생(시작)연도/일시 1862년 4월 2일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862년 6월 21일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관련인물/단체 전범조|민치서|김용집

[정의]

조선 후기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에서 일어난 반봉건(反封建) 농민항쟁.

[역사적 배경]

구미시 선산은 18세기 이래 농업생산력의 증대와 상품유통경제가 발달하는 추세 속에서 상업적 농업이 발달하였다. 선산에서는 쌀과 면화 및 면포가 상품화되어 경상도는 물론, 물길로 서울·강원도·충청도·함경도까지 판매되었다. 쌀과 면포 외에 마포·콩·보리 등도 상품화되어 장시에서 거래되었다. 이 같은 상업적 농업의 발달은 지주와 농민 모두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또 선산은 길재(吉再), 김숙자(金叔滋), 김종직(金宗直)을 잇는 영남 사림(士林)의 맥이 이어져 내려와 기반이 확고한 고장이었다. 이것은 서원이 5곳, 사우(祠宇)가 2곳이나 되는 규모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러한 사림적 향촌 세력을 유지하는 데에는 막대한 경제적 기반이 필요했다. 향촌 양반들은 대개 지주들로서 그들의 경제 기반을 유지하기 위한 지세(地稅) 징수 강화와 각종 부세(賦稅) 징수 과정에서 농민들과 대립되게 되었다.

[목적]

선산의 농민들이 지주(地主)들의 부세 수탈과 수령 및 이서(吏胥)들의 횡포를 저지하려고 일으킨 항쟁이다.

[발단]

선산 농민들이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전세, 즉 결가(結價) 문제였다. 결가의 액수는 1결당 30냥 정도로 추정되는데, 이를 쌀로 환산하면 10가마 정도로서 당시 1결당 생산량이 40가마니 정도였던 것을 감안하면, 결가는 생산량의 1/4에 해당하는 고가의 양이다. 결가는 액수만이 아니라 이를 책정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에서도 문제가 야기되었다. 그것은 양반 호수(戶首)들이 결가 수납 과정에 관여하면서 많은 이득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전세(田稅)를 쌀로 결정하느냐 포(布)로 결정하느냐에 따라 농민들의 부담도 달라졌다. 선산은 포가 많이 생산되는 곳이었기 때문에 선혜청 서리(胥吏)들이 뇌물을 먹으면서 이를 교묘하게 조종하였다. 결가가 이처럼 높아진 것도 부세를 담당하는 서리들이 수령과 농민들을 속였기 때문이다. 고액의 결가와 서리들의 농간은 선산 지방 농민항쟁의 객관적인 조건이 되었다.

[경과]

선산농민항쟁은 1862년 4월 2일 발생하였다. 전범조(全凡祚, 全範祖)가 중심이 되어 각 고을에 통문을 돌려 농민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이들은 결가 문제의 해결을 요구하며 관가로 몰려들었다. 선산부사 민치서(閔致序)는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위기 모면용으로 결가를 8냥으로 정한다는 완문(完文)을 써 주었다.

농민들은 내친김에 여기서 그치지 않고 서리들의 집과 양반들의 집 약 50채를 불태우고 부수었다. 민치서가 선산부사로 내려온 지는 7일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일을 당하자 감영으로 달려가 여러 차례 사임서(辭任書)를 올렸으나 감사가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선무사(宣撫使)가 상주에서 내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부사는 4월 27일 하는 수 없이 선산으로 돌아왔다.

감영에서는 부사의 보고를 듣고 포졸을 풀어 전범조를 체포하여 옥에 가두었으나 곧 풀려나왔다. 이는 전세 납부의 기일이 다가오면서 이를 예정대로 끝내기 위해 농민항쟁을 무마하려는 계산이었던 것 같다. 마침 선무사 이참현이 4월 28일 상주에서 출발하여 선산에 도착하였다. 그는 사건이 어떻게 전개되었으며, 부사가 감영에 도망가서 돌아가지 못하겠다고 한 이야기, 그리고 전범조가 잡혔다가 감영에서 곧 풀려나왔다는 사실 등을 전해 들었다.

그러나 선무사가 부사를 만났을 때, 부사는 전범조가 돌아오면 잡아다가 감영으로 보내자고 주장하였다. 부사는 이전에 당한 일 때문에 전범조를 몹시 두려워하였다. 다음날 선무사는 객사에서 읍민들을 불러 모으고 왕의 윤음(綸音)을 읽었다. 각 면에서 두서너 사람씩 형식적으로 참가하였다. 이들은 조용히 선무사의 말을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선무사는 난을 일으킨 죄를 꾸짖었고, 선무사의 말이 끝나고 읍민들은 각각 돌아갔다.

이때 전범조가 석방되어 읍내에 들어오면서 농민들을 선동하였다. 자신이 하고자 한 일을 영읍(營邑)에서 알고 있지만 마침 선무사가 내려왔으니 다시금 굳게 약속받아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다시 각 고을에 통문을 보내어 농민들을 급히 불러 모았다. 그의 말 한마디의 위력은 컸다. 오후가 되자 농민들은 읍내로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부사는 약속한 결가 8냥을 들어주지 않아서 자신을 공격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안절부절못하였다.

선무사는 전범조를 잡아들였다. 선무사는 관정 앞에 나타난 전범조를 보고 “무식한 놈이구나. 저런 자가 일을 꾸미다니. 저런 자는 위엄으로 눌러야 한다.” 하고 목소리를 높여 꾸짖었다. 그러나 전범조는 자신이 지도자가 된 것은 농민과 생활을 함께 하고 농민의 마음을 읽고 농민의 손발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고, 감영에서 풀려난 것은 농민을 위하는 마음을 알아주었기 때문이라고 일침을 놓으면서 당당히 맞섰다.

감사는 결가 문제와 관련해서는 김용집(金龍集)을 불러들였다. 김용집은 ‘근래 부세를 담당하는 서리들이 수령과 농민들을 속여서 결가가 이처럼 높아졌는데, 만일 자신이 장부를 조사한다면 8냥으로도 충분할 것’이라고 하면서 전범조와 더불어 수세장부를 조사하겠다고 하였다. 선무사도 이 말을 듣고 모든 농민들이 지켜보고 있으므로 장부 조사를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후가 되자 전범조가 다시 통문을 돌리자 농민들이 모여들었다.

저녁 때 부사는 선무사를 만나 대책을 논의하였다. 선무사는 김용집이 농민들과 한패가 되어 서리문서, 관가문서를 검토하고 나서 8냥이 족하다고 하는데 이서가 만일 변명하지 못하고 관에서 달리 할 말이 없으면 8냥으로 시행하는 도리밖에 없지 않느냐고 하였다. 주도면밀한 전범조와 김용집의 활동에 더 이상 농민들을 기만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부사도 도리 없이 그의 의견에 맞장구쳤다. 마침내 ‘민원에 따라 8냥으로 결정한다’는 전령을 써서 농민들에게 보여주었다. 선무사는 다시, 김용집이 농민들의 우두머리이니 그를 기쁘게 해야 일이 잘 풀릴 것이라고 했다. 부사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전령을 써서 김용집에게 수리(首吏)의 직분을 맡기겠다고 하였다. 농민들의 요구는 곧 관철되었다. 지도부의 뛰어난 대책과 농민들의 호응으로 승리를 거둔 것이다. 농민들은 승리를 만끽하면서 물러났다.

5월 1일 선무사는 동헌에서 식사를 하고 떠날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아직 안심이 되지 않았다. 만약 떠나는 길에서 전범조가 결가 8냥을 확인하는 도장을 요구하면 어떻게 할지를 고민하던 중 간교한 꾀를 떠올렸다. 두루마리에 ‘결가 8냥을 이미 영읍에서 정했으니 이것을 준행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쓴 다음 서명을 하고 도장을 찍어서 보관하였다. 떠나는 길에 부득이한 일이 생기면 이로서 위기를 모면할 작정이었다.

그가 떠나려 하자 예상대로 전범조와 농민 40~50명이 관가 뜰로 들어왔다. 전범조는 결가 인하에 대한 선무사의 확인 문적(文籍)을 요구하였다. 선무사는 간교한 꾀로 전범조를 꾸짖고는 “내가 이미 전령을 써서 내어주려고 하는데 네가 이렇게 공갈을 하니 내어줄 수 없다.”고 하면서 보관했던 문적을 꺼내어서는 붓으로 지워 버렸다.

이에 당황한 전범조는 선무사가 결가 8냥을 인정하였다고 믿고 그가 떠나는 것을 허용하였다. 무사히 빠져나온 선무사는 분노를 돌이키면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농민들은 계속 추이를 살폈다. 군비도 갖추었다. 부사 민치서는 드디어 도망쳐버렸다. 농민들은 읍의 권한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감영에서 전범조를 잡으려 한다는 소문이 돌자 농민들은 그를 보호하기 위해 선산으로 들어오는 큰 길을 막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검문하였다. 몰래 들어오려는 진영의 포졸을 잡아 살해하였다. 5월 중순경에는 상주에서 감영으로 가던 비장을 선산 해평에서 잡아 인질로 삼고 감영에 갇혀 있는 이예대와 교환하자고 하였다.

감사 이돈영(李敦榮)은 마침 감영에 머물고 있는 선무사와 영천(榮川) 군수에게도 대책을 의논하였다. 결국 감사는 이예대를 풀어준다고 해서 전범조를 잡아오지 못할 일이 없다고 판단하고 자기가 데려온 비장을 구하기 위해 이예대를 풀어주었다. 당시 모인 농민들은 6,000~7,0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비장은 잡힌 뒤 한 주막에 갇혀 있었는데, 이방 김용집이 와서 그를 풀어주었다. 이때에도 김용집이 농민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이는 선산농민항쟁의 지도부가 전범조·김용집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매우 굳건하게 농민들을 이끌어 나갔음을 말해준다. 농민들은 거의 6월 중순까지 선산부를 장악하였다.

[결과]

선산농민항쟁은 한동안 중앙에 보고되지 않았다. 부사 민치서(閔致序)가 도망쳤지만 신병으로 파직되는 데 그쳤다. 중앙에 알려지게 된 것은 5월 말 감사 이돈영의 보고서에 의해서였다. 감영에서 농민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으나 성과가 없었다.

그러나 중앙 군대가 내려온다는 소문이 나자 농민들은 동요하기 시작했고, 이를 틈타 장흥의 백기호가 병력을 이끌고 와서 주동자 전범조 등을 잡아들였다. 전범조와 김용집은 6월 21일 농민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처형되었고, 지도부를 잃은 농민들은 쉽게 무너졌다.

[의의와 평가]

선산 농민항쟁은 어느 곳보다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다른 곳에서는 관가의 공격, 이서가(吏胥家)와 양반가의 파괴 등으로 만족하고 흩어졌던 것에 비해, 선산 농민들의 기세는 선무사와 감영을 압도하였다. 수령과 선무사로부터 결가 8냥을 확인받았으며, 읍을 장악하고 비장을 잡아서 감영과 협상을 벌이는 등 다른 어느 지역보다 확실하게 읍권(邑權)을 장악하였다. 이것은 튼튼한 지도부와 농민들의 단결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앙 군대인 경군이 내려온다는 소문을 듣고 농민들이 흩어짐으로써 농민항쟁이 봉건권력 자체를 전면 부정한 단계까지는 이르지 못한 한계를 드러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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