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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201047
한자 金汝岉
영어음역 Gim Yeomul
이칭/별칭 사수,외암,피구자,장의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정운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성별
생년 1548년연표보기
몰년 1592년연표보기
본관 순천
대표관직 의주목사|충주도사

[정의]

조선시대 구미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순천. 자는 사수(士秀), 호는 피구자(披裘子)·외암(畏菴). 아버지는 찰방 김훈(金壎)이고, 아들은 영의정을 지낸 김류(金瑬)이다. 선산 연봉리에서 태어났다.

[활동사항]

김여물은 1577년(선조 10) 문과에 장원으로 등제하였으며, 충주도사를 거쳐 담양부사를 지냈다. 1591년에는 의주목사로 있을 때, 서인 정철(鄭澈)의 당으로 몰려 파직되고 의금부에 투옥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도체찰사 유성룡(柳成龍)김여물의 무략이 뛰어난 것을 알고 자신의 휘하에 두려고 하였으나, 도순변사 신립(申砬)의 요청으로 신립의 종사관으로 출전했다.

신립이 충주에 배수진을 치려고 하였을 때, 김여물은 많은 왜적을 적은 군사로 물리치려면 조령을 먼저 점령하여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또한 여의치 않다면 평지보다는 높은 언덕을 이용하여 왜적을 역습하는 것이 좋겠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결국 충청북도 충주의 달천(㺚川)에 배수진을 치고 신립과 함께 탄금대(彈琴臺) 아래에서 용전분투했으나 왜적에게 패하고 강에 투신하여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광해군 초에 충절로 정려되었지만 인조반정 뒤에 종래의 포상에 의심스러운 데가 많다고 하여 고쳐지기도 하였다. 1639년(인조 17) 아들 김류의 청에 의하여 다시 정표(旌表)되었으며, 뒤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1788년(정조 12) 장의(壯毅)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순조 때에는 임진왜란 때 순의(殉義)한 신립 등과 함께 충주 달천의 옛터에서 제사를 지내 충절을 기렸다.

이용자 의견
류** 구미 전자대전에는 선산 연봉리 출생이라 하여 출신지가 구미이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출신지가 평산이네요. 그리고 김여물이 충주와 안산 전자대전에도 중복 등재되어 있네요. 내용 정리 부탁. 2020.02.29
류** 김여물은 구미출신으로 등재. 아들로 인조반정 공신이자 영의정을 역임한 김류가 구미 전자대전에서 빠진 근거가 무엇인지요? 2020.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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