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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201437
한자 三一運動
영어의미역 Independence Movement in 1919
이칭/별칭 독립운동,항일투쟁,3·1만세운동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구미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영배

[정의]

1919년 3·1운동 시 경상북도 구미 지역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

[개설]

구미 지역의 3·1운동은 3월 12일 진평동에서 시작되어 약 한 달 동안 전개되었다. 진평동 독립만세운동은 3월 12일부터 14일까지 3일 동안 4차례에 걸쳐 적게는 20~30명에서부터 많게는 200여 명이 참여했으며, 체포되어 6개월 이상 감옥 생활을 한 인사만도 25명이나 되었다. 또 4월 3일 해평면에서도 60~70명의 동민들이 만세운동을 일으켰다가 일본 경찰의 탄압으로 55명이나 검거되었다. 4월 8일 임은동에서도 300여 명이 만세운동을 일으켜 주동자 30여 명이 검거되었다. 4월 12일 선산 장날에는 도개동 인사 권오환(權五煥)을 중심으로 50여 명의 장꾼들이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진평동 독립만세운동]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부터 시작된 3·1운동은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다. 구미 지역에서는 3월 12일 지금의 구미시 진평동에서 가장 먼저 일어났다. 대구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기 바로 전날인 1919년 3월 7일, 대구 계성학교 학생 이영식(李永植)이 등사판으로 인쇄된 「독립선언서」20매를 가지고 진평동에 거주하는 유지 이상백(李相栢)의 집을 찾아왔다. 이상백이내성(李乃成)이영식의 만세운동에 대한 설명과 권고가 있자 즉시 찬동하였다.

이상백은 같은 동네의 이영래(李榮來)·임점석(林點錫)·임용섭(林龍燮)·박명언(朴明彦)·권영해(權永海)·허도언(許道彦) 등과 상의하여 모두의 찬성을 얻었다. 이들은 거사일을 3월 12일로 정하였다. 이상백·임용섭은 「독립선언서」를 붓으로 써서 준비하고, 3월 11일에는 이상백의 집에서 이영식·이영래·임정석 등이 당일에 사용할 태극기를 만들었다.

3월 12일이 되자 박명언·허도언은 마을의 각 집을 방문하여 저녁에 있을 만세운동 사실을 알리고, 준비해 온 「독립선언서」를 마을 곳곳에 붙여서 동민들의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이날 오후 8시경 동민들 200여 명이 마을 뒷산에 모였다. 이때 이상백·이영식은 교대로 군중 앞에 나서서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조국이 멀지 않은 장래에 독립이 될 것이라는 사실과 또 이를 달성하기 위해 힘차게 만세운동을 전개해야 된다는 사실을 강조한 후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3월 13일 오후 4시경 마을 뒷산 같은 곳에서 동민 약 20명이 다시 독립만세를 외쳤고, 이날 저녁 9시에 또 다시 동민 약 30명이 같은 자리에 모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3월 14일 오후 9시경 동민들이 같은 장소인 뒷산에 모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이처럼 진평동에서는 연 3일 동안 4차례에 걸쳐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일본 경찰은 주동자 33명을 체포하였고, 그 중 25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는데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이상백(李相栢, 34세), 이내성(李乃成, 27세), 이영래(李榮來), 임점석(林點錫, 25세), 임용섭(林龍燮, 21세), 박봉술(朴鳳述, 27세), 박명언(朴明彦, 47세), 권영해(權永海, 35세), 이윤약(李允若, 41세), 장상건(張尙建, 22세), 장주서(張珠瑞, 37세), 서기옥(徐琦玉, 42세), 임삼선(林三先, 24세), 박근술(朴根述, 30세), 서천수(徐千壽, 22세), 박순석(朴順石, 25세), 김성윤(金性允, 25세), 박삼봉(朴三鳳, 28세), 박금출(朴金出, 27세), 장영직(張永稷, 31세), 권경보(權景甫, 29세), 장준현(張浚鉉, 27세), 김삼주(金三周), 임동석(林東碩), 김도길(金道吉, 22세) 등이다.

이들에 대한 재판 결과, 4월 25일 대구지방법원으로부터 이상백은 징역 2년, 이내성은 징역 1년 6월, 이영래·임점석·임용섭·박봉술은 각각 징역 1년, 박명언·권영해는 징역 10개월, 그 외 이윤약·장상건·장주단·서기옥·임삼선·박근술·서천수·박순석·김성윤·박삼봉·박금출·장영직·권경보·장준현·김삼주·임동석·김도길 등은 각각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이들은 모두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해평면의 만세운동]

해평면 산양동교회의 전도사 최재화(崔載華)는 인동면의 기독교도 박진오(朴鎭五)와 함께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계획하고 산양동·송곡동·금호동의 동민 약 60~70명을 함께 4월 3일 밤 11시 30분경 해평주재소로 몰려가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주재소 순사들이 무력으로 진압하자 격분한 군중들은 투석으로 맞섰다. 이에 일본 경찰들이 총탄을 발사하자 동민들은 할 수 없이 해산하였다.

주재소의 긴급 요청으로 선산경찰서에서 6명, 대구헌병대에서 3명, 상주수비대에서 1개 분대 11명 등이 달려 왔으나 이미 군중들은 해산한 후였다. 이튿날 일본 경찰은 만세운동에 참가했던 동민들 중 55명을 검거하였다. 이들 중 최재화는 피신하였으나 궐석 재판으로 1차에서 징역 3년, 2차에서 징역 8년을 선고받았고, 다른 24명은 각각 태형 80대를 받았다.

[임은동 독립만세운동]

임은동은 한말 의병장 허위(許蔿)의 출신지로 일찍부터 항일의 기풍이 강한 곳이었다. 더구나 임은허씨 집안은 허위가 순국한 이후 허겸(許蒹), 허학(許壆), 허노(許魯), 허형(許衡), 허발(許拔), 허첨(許燂) 등이 선봉이 되어 국권 회복과 독립을 위해 항일 투쟁에 앞장섰다. 3·1운동이 일어난 후 임은동의 강용준(姜龍浚), 유시동(劉時東)은 의거를 계획하고 1919년 4월 8일 밤 10시 300여 명의 동민들을 규합하여 임은동에서 밤늦도록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한 후 해산하였다.

이튿날 4월 9일에 선산경찰서 경찰 4명과 일본군 수비대 5명, 그리고 인동의 일본군 헌병주재소 헌병 2명이 달려왔다. 그러나 동민들은 마을 뒷산으로 이미 종적을 감추어서 한 사람도 붙잡히지 않았다. 4월 15일 다시 일본 군인과 경찰이 마을을 급습하여 강용준, 유시동을 비롯한 지도급 인사 30여 명을 체포했다. 임은동 독립만세운동의 관련 재판 기록은 전하지 않아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선산장터 독립만세운동]

선산면 동부동에 살고 있던 이유암(李有岩)은 3월 9일 진용섭(陳瑢燮), 한팔암(韓八岩), 김광수(金光洙) 등과 만났다. 이들은 선산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의하고, 선산공립보통학교 졸업생 박완동(朴完同)과 함께 3월 12일 밤 선산공립보통학교 기숙사로 들어가 학생들에게 권고하여 3월 13일 오후 3시 30분경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 독립만세를 외치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약속한 날의 만세운동은 교장이 모인 학생들을 강제 해산시킴으로써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이유암과 박완동은 일본 경찰에 붙잡혀서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 결과 4월 30일 대구지방법원 김천지청으로부터 보안법 위반죄로 각각 징역 10개월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선산공립보통학교 독립만세운동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후, 도개면 도개동에 사는 권오환(權五煥)이원길(李元吉), 김의경(金義景), 박희목(朴喜穆), 전용신(田容信) 등을 규합하여 선산 장날을 이용하여 거사하기로 약속하였다. 이리하여 4월 12일 장날 오후 6시경 장꾼들 사이에서 독립만세를 외치자 장꾼 약 50여 명이 호응하였다. 만세운동이 전개된 후 이들은 종적을 감추었으나, 이날 밤 일본 경찰의 불시 검문에 붙잡혀서 재판에 회부되었다. 5월 2일 대구지방법원 김천지청으로부터 권오환은 징역 1년 6개월, 그 외 이원길·김의경·박희목·전용신은 징역 10개월을 언도받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의의와 평가]

구미 지역 3·1운동의 중심지는 진평동, 임은동, 선산장터, 해평면이었다. 그 중에서 진평동해평면의 만세운동은 기독교계 인사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일반적으로 3·1운동은 면소재지와 같은 행정 중심지에서 주로 장날을 이용해 일어났던 데 비해, 진평동임은동, 그리고 해평면의 만세운동은 늦은 밤에 일어났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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