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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미당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202917
한자 察眉堂記
영어의미역 Account of Chalmidang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경상북도 구미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영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누정기(樓亭記)
작가 김응조(金應祖, 1587~1667)
창작연도발표연도 1641(인조 19)연표보기

[정의]

1641년(인조 19) 김응조가 구미 지역의 찰미당 설립 취지를 밝힌 누정기.

[개설]

김응조(金應祖, 1587~1667)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효징(孝徵), 호는 학사(鶴沙)·아헌(啞軒)이다. 「찰미당기」는 1641년 인동부사 김응조가 인동 관아를 이건하고 남은 재목으로 관아 남쪽 고을의 가장 높은 곳에 지은 찰미당(察眉堂)의 설립 취지를 밝힌 누정기(樓亭記)이다.

[내용]

55세인 1641년, 김응조찰미당을 짓고 목민관으로서의 자신의 치정 방법은 ‘관아에 들어오는 백성들 눈썹의 펴짐과 찌푸림을 보는 것.’이라고 소개하였다. 그 이유는 대개의 사람들이 좋을 때는 눈썹이 펴지고 화날 때는 눈썹이 찌푸려지는데, 관아에 들어오는 백성 대부분의 눈썹이 찌푸려져 있음은 곧 그들에게 무언가 노여워할 일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러한 상태를 해결하여 눈썹이 펴져 기분을 좋게 하는 것이 목민관으로서의 자신의 임무라고 술회하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람의 눈썹은 기쁘면 펴지고 성나면 찌푸려진다. 기쁨도 무상하고 노여움 역시 무상하니 폈다가 찌푸리고 찌푸렸다가 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며, 찌푸림은 진실로 펴짐의 징조이다.

내가 인동(仁同)에 도착한 이듬해 공관(公館) 동쪽에 관아의 건물을 이건하고, 남은 재목으로 그 남쪽에 당(堂)을 지으니 그 형세가 고을에서 가장 높았다. 서쪽은 낙동강[洛江]을 끌어안고 오산(烏山)과 마주하여 지세가 높고 넓어 즐길 만하니 어찌 좋은 경개에 나의 당(堂)을 이름 지을 것이 없겠는가?

나는 성격은 답답하고 재주는 졸렬하여 정치를 행함에 있어 토속(土俗)에 어두웠다. 여러 백성들이 관부에 오는데, 어른이나 아이 노소 할 것 없이 그들의 눈썹을 보니 모두 찌푸려 있고 마을에 있는 자들의 경우도 알 만하였기에 나의 당(堂) 이름을 ‘찰미(察眉)’라고 하였으니 대개 실상을 기록한 것이다.

시험 삼아 일찍이 당(堂)에 올라 살펴보니 말을 따르지 않는다고 성내는 자도 있고, 계획이 채택되지 않았다고 성내는 자도 있고, 간혹 무거운 세금에 대해 성내는 자도 있고, 간혹 번다한 부역을 성내는 자도 있고, 형벌을 시행함에 이르러 그 지나침을 성내는 자도 있으며, 송사를 판결하자 그 잘못을 성내는 자도 있었다.

아! 백성이 나에게 성내며 눈썹을 찌푸리는 것은 진실로 그 단서가 하나가 아니며 이러한 지경에 이른 원인이 “마음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더라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마음의 병은 갑자기 약을 쓴다고 해서 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비록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그들의 눈썹을 펴 주고 싶지만 할 수 있겠는가?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사물이 편함과 편하지 않음, 성함과 쇠함은 무궁한 시대까지 이어지니 오늘 찌푸린 것이 나중에 펴지지 않을 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내가 이미 백성들의 눈썹을 찌푸리게 하였으니 반드시 펴게 할 자도 있을 것이기에 기문(記文)을 써서 훗날의 군자에게 알리노라.”

[의의와 평가]

「찰미당기」는 도덕론적인 누정 명명법을 탈피하여 개성미 넘치는 누정의 이름을 제시함과 동시에 목민관으로서의 직분에 충실하려는 자세를 서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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