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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202962
한자 十五十六世紀朝鮮-人才鄕-善山
영어의미역 Seonsan, the Home of the Talented in 15-16 Century
분야 역사/전통 시대,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구미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성우

[길재가 선산으로 낙향하다]

조선 개국 직후 선산은 길재(吉再)의 고향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길재의 관료 생활은 길지 않았고 정계에서 주목받은 것도 아니었다. 34세가 되던 1386년(우왕 12) 문과에 합격한 이후 1387년(우왕 13) 성균관 학정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낙향하는 1390년(창왕 3)까지 4년 동안, 길재는 성균관의 박사(博士), 교수(敎授)와 같은 교육 관련 하위직에서 근무했을 뿐이었다. 따라서 그의 낙향을 눈여겨본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처럼 초라한 귀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길재는 후대에 이르러 정몽주(鄭夢周)와 더불어 여말의 충신으로, 그리고 조선 성리학의 연원으로 추앙을 받게 되었다. 낙향 이후 남면의 율리(栗里, 밤실)와 금오산 아래에서 성리학을 몸소 실천하고 제자들을 양성한 공로를 크게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길재의 도학자로서의 실천, 그리고 교육자로서의 명성은 수많은 제자들을 모여 들게 하였다. 승려로 출가했다가 유자(儒者)로 되돌아온 이들도 수십 명이나 되었다. 원래 승려였던 동생 길구(吉久)도 길재의 교화로 유학자로 복귀한 경우였다. 경술(經術)의 선비로서 길재 문하에서 학문을 성취한 이들은 수없이 많았다. 성현(成俔)은『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교육자로서의 길재를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공은 선산의 여러 생도들을 모아 양재(兩齋)로 나누어 가르쳤다. 양반의 후손들을 상재(上齋)로 삼고, 마을의 천한 집안 아이들을 하재(下齋)로 삼아 경사(經史)를 가르치고 부지런함과 게으름을 시험했는데, 하루에 가르침을 받는 사람이 백 수십 명이나 되었다.”

길재에게 감화를 받아 성리학을 연마하고 그 가르침을 실천했던 이들은 유생뿐만이 아니었다. 김종직(金宗直)은 ‘선산 10절(絶)’에서 그의 집안 가비(家婢)들도 절구질하는 동안 시사(詩詞)를 읊을 정도였다고 길재를 찬양한 바 있다. 길재의 이러한 노력으로 선산은 ‘정공향(鄭公鄕)’이라는 아칭을 얻었다.

[절의의 고장으로서 독보적 지위를 누리다]

이런 명성에 걸맞게 선산은 ‘절의의 고장’으로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다. 1420년(세종 2) 조선 정부는 건국 이후 효자·절부(節婦)·의부(義夫)·순손(順孫) 등 41명을 선발하여 그들의 행장을 정리하여 표창하는 국가사업을 대대적으로 추진하였다. 이때 선발된 41명 가운데는 약가이(藥加伊, 선군 趙乙生의 처), 불비(佛非, 학생 金玽의 처), 학생 전익수(田益修) 등 3명의 선산 출신이 포함되었다. 1개 군 출신 인물들이 전체 선발자의 무려 7.3%나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수절한 여성(약가이·불비)이거나, 시묘살이에 충실했던 남성(전익수)이었다.

절의의 고장으로서의 선산의 독보적인 지위는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국가의 표창 사업이 있은 지 12년이 지난 1432년(세종 14) 조선 정부는 또다시 16명의 절의·절부·효자·순손을 선발했다. 이때에도 선산 출신으로 전좌명(田佐命)서즐(徐騭) 두 사람이 포함되어 전체 선발자의 12.5%를 차지하였다. 이들 두 사람은 모두 상장례(喪葬禮)를 잘 지켜 표창을 받은 경우였다. 그로부터 23년이 지난 1454년(단종 3)에 효자·절부 36명을 표창할 때에도 선산 출신은 3명으로 전체 선발자의 8.3%나 되었다. 김효충의 처 한씨, 향리 백동량(白同良)의 처 소사, 전 부사정 강극지(康克智)가 그들이었다. 이처럼 15세기 전반기 내내 선산 출신의 절의자·효행자는 타 군현의 수치를 압도했다.

이러한 향풍이 길재 한 사람의 힘만으로 이뤄진 것은 물론 아니었다. 선산은 고려 말 이래 절의적 기질과 성리학 실천으로 이름을 떨친 이들이 유난히 많은 고을이었다. 고려왕조의 멸망을 앞두고 중국으로 망명한 김주(金澍)와 관련된 설화들, 전 김해부사 김치(金峙)의 교화 노력 등도 그러한 경우였다. 이들의 노력에 힘입어 선산은 성리학에 조예가 깊은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을 뿐만 아니라, 절의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수많은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다]

조선 개국 초기 선산은 문과 급제자가 대거 배출된 지역이자, 장원·부장원이 연이어 나온 지역으로도 유명했다. 길재의 고제 김숙자(金叔滋)가 1414년(태종 14) 소과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하였을 때, 동료들은 김숙자를 반드시 ‘선산인 김모’라고 불렀다고 한다. 아들 김종직은 “선산은 본래부터 풍속이 문학을 숭상한다고 일컬어져 왔으므로, 공(김숙자)을 그 지망(地望)으로 삼고자 하는 것”이라고 『이존록(彛尊錄)』에서 그 이유를 밝혔다.

선산 출신으로 개국 이후 60년 동안 문과에 합격한 인원은 36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장원 혹은 부장원으로 합격한 사람은 전가식(田可植)·하담(河澹)·유면(兪勉)·정초(鄭招)·정지담(鄭之澹)·하위지(河緯地) 등 6명이었고, 집현전 학사 출신은 김효정(金孝貞)·박서생(朴瑞生)·김말(金末)·하위지(河緯地)·김지경(金之慶) 등 5명이었다. 그리고 2품 이상 재상급 고위 관료는 김자연(金自淵)·김효정·정초·박서생·김말·이숙전(李叔傳)·하위지·이계전(李季傳)·김감(金堪)·김지경 등 10명에 달했다.

15세기 전반기 선산 출신 인사들의 중앙 정계에서의 이와 같은 활약상으로 선산은 “학문을 좋아한다(好學文)”는 지망(地望)을 얻었다. 김숙자가 ‘선산인 김모’라 불린 까닭도 여기에 있었다. 『경상도지리지』는 선산의 풍속을 언급하면서, “화려함을 숭상하고 학문을 좋아한다.(俗尙華麗 好學問)”고 하였다. 『경상도지리지』에서 ‘호학’의 풍속을 가진 고을은 경주·상주·진주·성주·김해·밀양·선산·영천·창녕 등 9곳에 지나지 않았다. 조선 초기 인재향 선산은 이러한 분위기와 향풍 속에서 탄생했던 것이다.

[계유정난에 반대한 선산 출신의 절의파들]

선산 출신 가운데는 여말 이래 절의적 기질이 강한 사람들이 유난히 많았다. 길재가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이지만, 중국으로 망명한 김주에 대한 설화, 그리고 김주의 처남으로 낙남(落南)한 김기(金起) 등에 이르기까지 고려왕조에 충성을 다한 수많은 인사들이 있었다. 길재의 사례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이 이들은 대체로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이러한 지역적 전통은 조선 초기 이래 수많은 관료, 학자들에게 전승되었다.

선산은 충효적 가치관에 목숨을 거는 인물들이 다수 배출되었다는 점에서도 특이한 지역이었다. 사실 충과 효는 동전의 양면이었다. 유교는 가정에서의 효도야말로 국가, 사회로 확대되어 충성으로 전환된다고 굳게 믿는 정치사상이었기 때문이다. 가정과 향당(鄕黨)에서 칭송받는 효자·절부·의부·순손 등은 국가적 사안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는 충신·절신(節臣)으로 전화하였다. 15세기에 벌어진 각종 정변에서 선산 출신들이 불의에 항거하고 명분에 투철한 지사적 모습을 보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이런 분위기를 대표하는 인물이 사육신 가운데 한 사람으로 칭송받는 하위지(河緯地)와 생육신 이맹전(李孟傳)이었다.

건국 이후 급속하게 안정을 찾으면서 태평성세를 구가하던 조선왕조는 계유정난(癸酉靖難)이라는 일대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수양대군이 왕권을 장악하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세종문종이 양성한 집현전 학사 출신 관료들 대부분은 계유정난을 지지했다. 그리고 이들 대부분은 단종 퇴위와 세조 즉위라는 정치 상황에서 세조 편에 섰다. 계유정난과 세조 즉위를 지지했던 대부분의 집현전 관료들은 이후 세조~성종 대 집권 세력이었던 훈구 세력의 핵심으로 성장하였다. 그렇지만 집현전 학사 모두가 이때의 정변에 찬동한 것은 아니었다.

계유정난이 발발한 11월 초 정인지(鄭鱗趾)·최항(崔恒)·신숙주(申叔舟) 등 기라성 같은 집현전 출신 관료들이 정난공신(靖難功臣)에 임명되어 축제 분위기에 휩싸여 있을 때, 상호군 하위지는 요양을 핑계로 선산으로 내려갔다. 같은 집현전 학사 출신 경창부(慶昌府) 소윤(少尹) 김지경(金之慶)도 노부모 봉양을 이유로 사직서를 제출했다. 선산 출신 인사들 가운데 계유정난에 비판적인 인물들이 많았던 것이다.

이처럼 선산 출신 집현전 학사들은 계유정난의 부당성을 간접적으로 비판하고 있었지만, 당시 상황에서 이러한 정치적 견해를 표시했던 이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집현전 학사 출신으로 1456년(세조 2) 이른바 사육신 사건에 연루되어 참화를 당한 인물은 박중림(朴仲林)·박팽년(朴彭年) 부자, 성삼문(成三問), 하위지, 유성원(柳誠源), 이개(李塏) 등 몇 명에 불과했다. 성종 대까지 생존했던 집현전 출신 관료 가운데 공신에 책봉되지 않은 이는 김지경·이파(李坡)·이예(李芮) 등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사육신 사건의 피해는 막심했다. 이 사건의 주동자급 인물인 하위지뿐만 아니라, 아버지 하담(河澹), 형 하망지(河網地), 동생 하기지(河紀地)·하소지(紹地), 아들 하련(河璉), 그리고 처남 김감(金堪)에 이르기까지 일문이 멸해지는 대참화를 겪었다. 이 사건으로 장원방(壯元坊)이라 불린 영봉리 최고 가문인 진주하씨는 소멸했다. 이때를 전후하여 관직 생활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칩거 생활에 들어간 선산 출신도 많았다. 이맹전과 그의 장인 김성미(金成美), 처남 김수정(金壽貞) 등이 그러한 경우에 속한다. 이맹전이 이후 김종직의 제자 남효온(南孝溫)에 의해 생육신으로 추앙받았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사화에 피해를 입은 선산 출신의 신진 사림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집권 훈구 세력에 대한 날카로운 대립 의식을 느끼면서 동지들을 규합했던 인물은 김종직이었다. 김종직은 의분과 지기에 공감하는 동지들에 대해 남다른 추모와 정성을 보였다. 그는 도학을 실천하는 제자들이나 연소한 관료들을 동지로 허여했으며, 그들의 학문적·정치적 성장을 지원하였다. 그렇지만 김종직의 동지적 결속의 추구와 정치 세력화 움직임은 이들 인물의 험난한 정치적 역경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훈구 관료들이 다른 사상적·정치적 의식과 지향을 갖고 있던 이들의 정치적 성장을 결코 좌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종직의 제자들은 성종 후반기 이후 훈구 세력과 날카로운 정치적 대립을 벌여 나갔다. 그리하여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를 계기로 이들 대부분이 피해를 입은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무오사화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이들은 그로부터 6년 뒤인 1504년(연산군 10)에 벌어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또다시 타격을 입었다. 연산군 대의 두 차례 사화를 겪으면서 김종직 제자들은 사형에 처해지거나 유배당하는 등 정치적으로 회복하기 어려운 타격을 입었다. 선산 출신으로 무오사화 때 피해를 입은 인물로는 유배형에 처해진 강백진(康伯珍)김굉필(金宏弼)이 있었다. 갑자사화 때는 강백진김굉필이 사형에 처해졌고, 정붕(鄭鵬)은 유배되었다.

중종반정 이후 연산군의 광기 어린 폭정은 사라졌다. 그렇다고 새로운 사회가 도래하지도 않았다. 반정을 주도했던 공신들 대부분이 훈구 세력의 계보를 잇는 서울의 벌열 출신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연산군의 폭정 아래에서 치부하고 권력을 휘두른 세력이었을 뿐만 아니라, 두 차례의 사화를 주도하면서 신진 관료들을 정계에서 쓸어내는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들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들은 성종 후반기 영남 출신 신진 관료들의 정치 공세 속에서 수세에 몰렸던 훈구 세력 혹은 그들의 후예들이었다. 신진 관료들의 입장에서는 이들 또한 연산군의 몰락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만 할 세력이었다.

도덕지향론자들이었던 신진 관료들의 중앙 정계 진출은 1515년(중종 10)을 전후한 시기에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반정공신들로부터 거리를 두기 시작한 중종조광조(趙光祖)를 위시한 도덕론자들에 대해 호감을 갖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조광조 그룹이 중앙 정계로 본격적으로 진출하는 상황에서 훈구 세력들의 정치적 입장은 크게 약화되었다. 그렇지만 중종조광조 일파의 정치적 공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개혁에 피로를 느낀 중종조광조 일파를 멀리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틈새를 이용하여 훈구 세력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1519년(중종 14)에 발발한 기묘사화(己卯士禍)가 그것이었다. 선산 출신으로 기묘사화 때 피해를 입은 관료는 김식(金湜)박영(朴英), 두 사람이었다. 김식은 사형에 처해졌고 박영은 해직되었다.

[선산 송당학파 성립]

박영은 기묘사림의 활동기에 동부승지·병조참판과 같은 요직을 차지하면서 군권을 장악했던 핵심 인물이었다. 양녕대군의 외손자여서 왕실의 정치적 배려에 의해 가까스로 죽음을 면했던 박영은, 이후 선산 동면 생곡에 송당(松堂)을 짓고 제자들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훗날 제자들에 의해 송당 선생으로 불리게 된 박영의 강학 활동과 도학자로서의 실천적 삶이 시작된 것이다. 훗날 송당학파로 불린 박영 문하에서 김취성(金就成)·김취문(金就文) 형제, 박운(朴雲), 최응룡(崔應龍)과 같은 선산 출신의 걸출한 유학자들이 배출되었다. 또한 성주 출신의 김희삼(金希參), 태인 출신의 이항(李恒), 경기 출신의 박집(朴緝)·박소(朴紹) 형제와 같은 타지 출신의 유학자들도 배출되었다.

16세기는 도학자를 높이 평가하는 분위기가 한층 강화되던 시기였다. 연산군의 폭정, 중종의 우유부단한 정국 운영과 같은 정치경제적 난맥상과 맞물리면서, 지식인 사회에서 도덕 사회 실현을 위한 정치사상으로서의 도학이 공감을 샀기 때문이다. 선산은 도학에 관한 한 선구 지역답게 16세기에도 일정한 역할을 수행했다. 정붕박영의 도학 실천, 그리고 박영의 강학 활동이 그것이었다. 1568년(선조 원년) 당시 사림파의 영수이자 영의정이었던 이준경(李浚慶)은 “지금 모두들 도학하면 조광조를 추존할 뿐이고, 박영·정붕에 대해서는 세상에서 아는 이가 없다”고 당시 사림파의 편향된 분위기를 비판한 적이 있다. 이러한 주장은 중종에서 명종 대 선산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송당학파에 대한 원로 사림파의 객관적인 평가였다고 생각된다.

한편 선산 출신 송희규(宋希奎)·김취문·최응룡 등은 중종에서 명종 대에 각각 문과에 합격, 관로에 진출했다. 파행으로 일관했던 조선 11대 군주 중종이 서거하고, 1544년 인종이 즉위하면서 사림파의 활동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인종은 세자 시절부터 성리학에 대한 관심이 높았고, 도학을 실천하려는 의지가 매우 강한 군주였다. 인종의 즉위로 사림파에 대한 우호적인 분위기가 조성된 상황에서 선산 출신 인사들의 목소리도 한층 커져갔다.

1544년(중종 39) 당시 강원도사로 재직 중이던 김취문중종의 국상을 『주자가례』에 의거 삼년상으로 할 것을 건의하여 인종으로부터 칭찬을 들었다. 강중진(康仲珍)의 손자 강유선(康惟善)은 이 무렵 조광조를 위시한 기묘사림의 신원 운동을 이끌었고, 인종 급서 이후에는 『주자가례』 실행 논의를 주도하는 등 성균관 유생들을 중심으로 한 정치운동의 기수로 활동했다.

그렇지만 1545년 인종의 급서, 그리고 그의 이복동생이자 문정왕후 소생인 명종의 즉위는 1년도 채 되지 않은 인종의 짧은 재위 기간 동안 정치적 견해를 활발하게 제출했던 수많은 사림파 관료 혹은 학자들에게는 재앙이었다. 김취성·김취문 형제의 처남 송희규는 1545년(인종 1) 을사사화 당시 백인걸(白仁傑)과 더불어 이기(李芑)·윤원형(尹元衡)과 같은 권신들을 비판하다가 좌천되고 유배형에 처해졌다. 박영의 제자이자 동향 출신 관료 김진종(金振宗)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순창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음을 맞았다. 강유선은 1549년(명종 4) 이홍윤(李洪胤) 무고 사건에 연루되어 끝내 죽임을 당했으며, 김취문은 좌천되어 지방관으로 전전해야만 했다. 을사사화 이후 선산 출신들의 피해는 이처럼 막심했다. 이로 인해 명종 후반 사림파가 집권할 때까지 20여 년 간 선산 출신 인사들의 움직임은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명종 대에 숨을 죽이면서 정세를 관망하던 사림파는 1565년(명종 20) 문정왕후 사망을 계기로 훈척 세력에 대한 일대 공세를 감행했다. 마침내 이준경을 영수로 한 사림 정권이 탄생하였다. 명종 사후 사림파에 의해 발탁된 16세 소년 군주 선조의 즉위로 사림 정권은 한층 더 안정되었다. 이 과정에서 선산 출신으로는 김취문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김취문은 암울했던 명종 치세 20여 년 동안 지방관 재직과 해직을 반복하면서 지조를 지켰고 청백한 관직 생활로 명망이 높았던 중견 관료였다. 사림 정권의 출범과 동시에 중앙 무대에 복귀한 그는 3~4년 동안 승지·대사성·대사간·홍문관 부제학 등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차기 재상감으로 지목되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김취문은 1570년(선조 3) 향년 62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이후 선산 출신은 최응룡·최현(崔晛) 등으로 명맥이 이어졌지만, 격렬했던 선배들의 정치적 역경이나 학문적 수준을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려웠다.

[도학의 주도권 상실]

이처럼 선조 대 사림 집권기에 이르러 선산은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더 이상 선진성을 독점한 지역이 아니었다. 도학은 이제 더 이상 선산 지역의 전유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는 선산의 송당학파를 능가하는 학파들이 전국에 걸쳐 형성된 시기이기도 했다. 이황(李滉)이 주도했던 안동의 퇴계학파, 조식(曺植)이 주도했던 진주의 남명학파, 서경덕이 주도했던 경기의 화담학파 등이 그러한 학파들이었다. 선조 초반 중앙 정계를 풍미했던 실세 정치가들의 대부분은 이들 3대 학파에서 배출되었다. 이 과정에서 송당학파로 결집된 선산 출신 유학자들의 비중은 자연히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1575년(선조 8)의 동서 분당 그리고 1589년(선조 22)의 남북 분기 이후, 영남의 사상계는 퇴계학파와 남명학파로 양분되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영남 중부권에서 성주 정구(鄭逑)의 한강학파와 인동 장현광(張顯光)의 여헌학파가 또다시 독자적인 학파로 성립하였다. 이 과정에서 송당학파로 명맥을 이어가던 선산의 유학자들은 안동 유성룡의 서애학파와 인동 여헌학파로 흡수되면서 소멸 국면에 접어들었다. 이후 선산은 더 이상 걸출한 성리학자를 배출하지 못했다. 그에 따라 독자적인 지역 기반을 가진 학파 성립을 보지 못한 채 쇠퇴 국면으로 접어들 수밖에 없었다.

16세기 후반 이후 비록 쇠퇴해 갔음에도 불구하고, 선산은 15세기 전 기간과 16세기 전반까지 조선 성리학을 선도하는 지역으로서 부동의 지위를 누린 지역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최현『일선지』를 편찬하면서 인물조 이외에 선현조를 별도 항목으로 떼어내어 인물을 서술하는 방식을 택했다. 최현이 규정한 선현은 “사림의 긍식(矜式)이 되는 인물들”이었다. 여기에 해당되는 인물들은 길재·김주·하위지·이맹전·김숙자·김종직·김굉필·정붕·박영·박운·김취성·성운(成運) 등 12명이었다. 이들이 바로 15세기와 16세기 전반까지 조선 성리학의 선도 지역이던 선산을 대표하던 인물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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