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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창 박록주의 삶과 예술세계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202963
한자 名唱朴綠珠-藝術世界
영어의미역 The Life and Art of the Great Singer Bak Rokju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구미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석배

[20세기 판소리계를 이끈 명창 박록주]

자신의 세계를 올곧고 비옥하게 가꾸며 사는 것은 아름답다. 더구나 남들이 근접하기 어려운, 가치 있는 것을 위해 한평생을 바치는 일은 아름답다 못해 숭고하다. 판소리 명창 가운데 이런 삶을 살았던 명창이 적지 않지만 근래의 명창 중에서 박록주만큼 그렇게 산 이도 흔치 않다.

수많은 소리꾼 중에서 어떤 소리꾼을 명창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적어도 다음과 같은 조건을 두루 갖추어야 명창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판소리 기량이 탁월해야 하고, 둘째, 그 소리는 정통성과 역사성이 있어야 하며, 셋째, 내세울 만한 개성적인 더늠이 있어야 한다. 넷째, 판소리 향유층의 폭넓고 절대적인 지지를 확보하고 있어야 하고, 다섯째, 판소리 발전에 뚜렷하게 공헌한 바가 있어야 할 것이다. 박록주야말로 이런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으니 명실상부한 명창이라고 할 수 있다.

박록주는 판소리에 일생을 바치며 치열한 예술적 삶을 살다간 판소리의 거장이다. 20대부터 장래가 촉망되는 소리꾼으로 주목을 받았고, 그런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20세기의 판소리 특히 해방 후 판소리사의 중심에서 판소리 발전에 기여하였다. 20세기에 들어 이화중선·김녹주·강소춘·배설향·김초향·김추월·신금홍 등 적지 않은 여류 명창들이 명성을 얻었지만 박록주만큼 명문의 법통 소리를 고루 익힌 정통파 소리꾼은 드물다.

그리고 김소희·박귀희·박송희·한애순·조상현·한농선·성창순 등 이 시대의 판소리를 이끌고 있는 수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였고, 자신의 개성에 맞게 「흥보가」를 새로 다듬었으며, 열악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판소리보존회를 설립하여 정통 판소리를 보존하기 위해 무던히 애쓴 사실 등을 통해 볼 때, 오늘날의 판소리에 그보다 더 큰 영향을 끼친 이는 드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욕의 소리 인생]

박록주는 『한국일보』에 연재된 「나의 이력서」에서 자신의 인생을 밝힌 적이 있다. 박록주가 밝힌 바에 따르면, 1905년 1월 25일(음) 경상북도 선산군 고아면 관심리 437번지에서 아버지 박중근(朴重根)과 어머니 권순이(權順伊) 사이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초명은 박명이(朴命伊)였다. 농사를 많이 짓는 편이어서 먹고사는 걱정은 없었으나 아버지가 한량이어서 집안일은 어머니가 감당했으며 자신도 집안일을 많이 도왔다고 했다. 그러나 호적에 따르면 박록주는 1905년 2월 15일생으로 되어 있고, 아버지는 박재보(朴在甫), 어머니는 박순이(朴順伊)로 되어 있다.

박록주는 부친에게 토막소리를 배우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험난한 소리꾼의 길에 들어선다. 본격적으로 판소리 공부에 나선 것은 12세인 1916년으로 선산에 온 협률사 공연을 본 부친이 목소리가 쟁쟁한 딸을 나라 제일의 명창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때 마침 선산 해평의 도리사 부근에 머물고 있던 박기홍 명창에게 보냈던 것이다. ‘녹주(綠珠)’라는 예명도 이때 부친이 지어주었다.

박기홍이 누구던가? 동편제의 법통을 혼자 두 손바닥 위에 받들어 들고 끝판을 막다시피 한 종장(宗匠)이요, 가신(歌神)·가선(歌仙)이라는 평을 받던 절세의 명창으로, 일찍이 대원군고종의 두터운 총애를 입어 참봉의 직계를 받았다. 박기홍은 소리금을 정하고 소리하였을 정도로 예인으로서의 자부심도 대단하였고, 죽어도 비굴하게 살지 않는다는 대쪽 같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당시 선산군수는 박기홍이 인사를 오지 않자 몹시 괘씸하게 여겨 오만한 버릇을 고친답시고 박기홍을 불러서 소리를 시켰는데, 트집을 잡는 것은 고사하고 「적벽가」의 관운장 호통 소리에 깜짝 놀라 의자에서 떨어져 오히려 망신만 당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하고 있다.

박록주박기홍에게 두 달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하루 20시간 이상 소리공부에 매달려 「춘향가」 전바탕과 「심청가」 일부를 배워 동편제 소리의 기틀을 닦는 한편으로 예술인이 가져야 할 자세도 착실히 배웠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박기홍에게 배운 소리와 예술가로서의 정신은 훗날 박록주가 명창으로 우뚝 설 수 있게 한 밑거름이자 명창의 길을 올곧게 걸어 갈 수 있게 한 버팀목이 되었다.

소녀 명창으로 이웃 고을인 김천·왜관·상주 등의 잔칫집에 불려 다니던 박록주는 1918년(14세) 선산에 들린 김창환 협률사를 따라 다니며 김창환과 김봉이에게 단가와 토막소리 한두 개를 배우게 된다. 그 후 대구 앞산에 있는 절에서 두 달 동안 강창호에게 「심청가」의 ‘초앞’부터 ‘심청이 인당수에 빠지는데’와 단가 「고고천변」을 배웠다. 이어 대구의 샘밖 골목에 있던 행수기생 출신 앵무의 달성권번에 다니며 춤·시조·소리를 배우는 등 기생 수업을 했고, 1919년에 다시 달성권번에서 김점룡·임준옥·조진영에게 남도 민요 「육자배기」와 「화초사거리」를 배웠다. 박록주는 이때 이미 대구에서 김초향 다음 가는 명창으로 이름이 나기 시작하였다.

1923년(19세)에 서울로 올라가 송만갑에게 단가 「진국명산」과 「춘향가」의 ‘사랑가’에서부터 ‘십장가’까지 배웠다. 우미관에서 열린 명창대회에 참가하면서 서울에서도 명창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여 한남권번 소속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김창환에게 ‘제비노정기’를 배운 것도 이 무렵이다. 1926년(22세) 가을에 송만갑, 김해 김녹주와 진고개에서 녹음하면서 음반 취입을 시작하였고, 그 후 콜럼비아, 빅타, 오케, 폴리돌, 시에론, 다이헤이 음반 등에 수많은 명곡을 남겼다. 또한 1926년 9월 16일 경성방송국 국악 방송에 처음으로 출연한 이래 100여 차례 국악 방송에 출연하였다.

1930년(26세)에 한성권번 소속으로 조선음률협회 주최 명창대회에 참가하였다. 남백우와 헤어지고 조선극장 지배인 신용희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이 무렵 연희전문학교 학생으로 나중에 「봄봄」, 「동백꽃」을 지은 소설가 김유정의 끈질긴 구애 사건으로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김유정은 거의 매일 구애 편지를 보냈고, 환심을 사기 위해서 비단 치맛감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래도 박록주가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자 혈서를 보내는가 하면 직접 찾아가 죽이겠다는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훗날 김유정박록주와의 일을 단편소설 「두꺼비」(1936)와 「생의 반려」(1937)로 남겼다. 다음은 김유정의 「두꺼비」에 나오는 구절이다.

권연 하나만 피워도 멋만 찾는 이놈이 자전거를 타고 나를 찾아왔을 때에는 일도 어지간히 급한 모양이나 그러나 제말이면 으레히 복종할 걸로 알고 나의 대답도 기다리기 전에 달아나는 건 썩 불쾌하였다. 이것은 이놈이 아직도 나에게 대하여 기생오래비로서의 특권을 가질랴는 것이 분명하다. 나는 사실 놈이 필요한 데까지 이용당할 대로 다 당하였다. 더는 싫다, 생각하고 애꿎은 창문을 딱 닫힌 다음 다시 앉어서 책을 뒤지자니 속이 부걱부걱 고인다. 하지만 실상 생각하면 놈만 탓할 것도 아니요 어디 사람이 동이 낫다구 거리에서 한번 흘낏 스쳐본, 그나마 잘났으면 이어니와, 쭈그렁 밤송이 같은 기생에게 정신이 팔린 나도 나렷다. 그것두 서루 눈이 맞어서 달떴다면이야 누가 뭐래랴마는 저쪽에선 나의 존재를 그리 대단히 녀겨주지 않으려는데 나만 몸이 달아서 답장 못 받는 엽서를 매일같이 석 달 동안 썼다. 하니까 놈이 이 기미를 알고 나를 찾아와 인사를 떡 붙이고는 하는 소리가 기생을 사랑할랴면 그 오래비부터 잘 얼려야 된다는 것을 명백히 설명하고 또 그리고 옥화가 즈 누이지만 제 말이면 대개 들을 것이니 그건 안심하라 한다. 나도 옳게 여기고 그담부터 학비가 올라오면 상전같이 놈을 모시고 다니며 뒤치다꺼리하기에 볼일을 못 본다. 이게 버릇이 돼서 툭하면 놈이 찾어와서 산보 나가자고 끌어내서는 극장으로 카페로 혹은 저 좋아하는 기생집으로 데리고 다니며 밤을 패기가 일수다. 물론 그 비용은 성냥 사는 일 전까지 내가 내야 되니까 얼뜬 보기에 누가 데리고 다니는 건지 영문 모른다. 게다 즈 누님의 답장을 맡어 올 테니 한번 보라고 연일 장담은 하면서도 나의 편지만 가져가고는 꿩 구어 먹은 소식이다. 편지도 우편보다는 그 동생에게 전하니까 마음에 좀 든든할 뿐이지 사실 바루 가는지 혹은 공동변소에서 콧노래로 뒤지가 되는지 그것도 자세 모른다.

박록주김유정이 죽은 후 평생 동안 그의 사랑을 매정하게 뿌리친 것을 후회하였다고 한다. 1931년 초 김성수의 부친인 김경중의 배려로 남원 주천면에 있던 김정문을 찾아가 20여 일 동안 「흥보가」(‘초앞’부터 ‘제비 후리러 나가는데’)와 「심청가」 전바탕을 배웠다. 1934년(30세)을 전후한 시기에 송만갑에게 「적벽가」, 정정렬에게 「춘향가」와 「숙영낭자전」, 유성준에게 「수궁가」를 배웠고, 1934년 5월에 창립된 조선성악연구회 회원으로 각종 명창대회와 창극에 출연하여 이름을 날렸다. 1942년(38세)에는 조선음악단의 일원, 1944년(40세)에는 조선이동창극단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해방 후인 1945년 11월에는 조선창극단, 1946년부터는 국악원 산하 단체인 국극사에서 활동하였다. 1948년(44세) 봄에 박귀희·김소희·임춘앵·정유색·임유앵·김경희 등 30여 명의 여류 명창을 규합하여 여성국악동호회를 결성하여 「옥중화」, 「햇님 달님」 등 창극을 무대에 올렸다. 1950년(46세) 6·25전쟁이 발발하자 정남희 등의 월북 강요로 고초를 겪었고, 1·4 후퇴 때에는 오태석·신숙·이용배·조농옥·김세준·한농선 등 30여 명과 함께 국민방위대에 입대하여 1952년 초까지 「열녀화」로 군 위문공연을 다녔다. 눈병으로 한쪽 눈을 잃게 된 것은 1952년 3월의 일이다. 1953년(49세) 대구에서 강태홍·박춘흥·박연자·박병두·한영순·나경애 등 40여 명으로 국극사(國劇社)를 결성하여 「열녀화」로 동부 전선에 위문공연을 다녔다.

박록주의 유랑극단 생활은 1960년 초 급성폐렴으로 경찰병원에 입원하면서 끝나게 된다. 1960년(56세) 서울국악예술학교에 나가는 등 제자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1964년 12월 24일 김연수·김소희·김여란·정광수·박초월 등과 함께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 보유자로 지정되었고, 1973년 11월 5일 판소리 흥보가 보유자로 다시 지정되었다. 국악 발전에 끼친 그간의 공이 인정되어 공로상(1964년)과 문화재공로상(1968년) 등을 수상하였고, 1969년(65세) 10월 15일 명동국립극장에서 가진 은퇴 공연을 끝으로 공식적인 무대 활동을 마감한다.

박록주는 1971년 정통 판소리를 보존하기 위해 판소리보존회를 설립하고, 1972~1974년 회장을 맡아 판소리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판소리보존회에서는 1971년 7월 5일 제1회 판소리유파발표회를 개최한 후 2006년 11월 18일 제36회 유파발표회를 열어 정통 판소리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박록주는 1978년 제자발표회와 고향 선산에서의 공연을 마지막 무대로 1979년 5월 26일 향년 75세를 일기로 면목동에서 소리만 남겨둔 채 한 많은 소리꾼의 삶을 접었다.

[박록주의 소리 세계]

박록주는 「흥보가」의 인간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주로 「흥보가」를 불렀기 때문에 박록주 하면 으레 「흥보가」를 떠올리지만 일제강점기에 제비표조선레코드를 비롯한 각종 유성기 음반(SP)과 해방 후에 지구레코드사 등에서 낸 장시간 음반(LP) 등에 실로 다양한 소리를 남기고 있다. 이 녹음들은 그가 다른 소리꾼이 쉽게 다다를 수 없는 경지에 이른 당대 최고의 소리꾼임을 알려주기에 충분하다. 박록주의 소리는 그만의 독특한 빛깔을 지니고 있다. 화사하지는 않지만 은은하고 그윽한 향기를 머금고 있는 기품 있는 소리가 그의 소리이다.

박록주는 1927년에 일동축음기주식회사에서 낸 ‘단가 한송정 소상팔경’를 필두로 1930년대 중반까지 콜럼비아, 오케, 빅타, 폴리돌, 다이헤이, 시에론 음반 등에 수많은 명곡을 남기고 있다. 단가로는 「소상팔경」·「강산유람」·「초한가」·「만고강산」·「대관강산」·「죽장망혜」·「귀불귀」·「진국명산」·「운담풍경」·「장부한」 등을 남겼다. 「춘향가」는 어릴 때 박기홍에게 배웠고, 뒤에 다시 송만갑정정렬에게 배웠기 때문에 그들의 소리제가 섞여 있다. ‘사랑가’에서 ‘십장가’까지는 송만갑제이고 나머지는 정정렬제인데, 일부 박기홍제가 섞여 있을 것이다. 「심청가」는 김정문제로 유성기 음반에 젊은 시절의 소리가 토막소리로 남아 있고, 1970년대에 녹음된 「심청가」 전편이 전하고 있다.

「흥보가」는 김창환제 ‘제비노정기’ 이외에는 김정문제로 유성기 음반에 토막소리가 여럿 남아 있고, 해방 후에 자신의 소리제로 다듬은 「흥보가」를 장시간 음반에 남기고 있다. 유성준에게 「수궁가」를 배웠고, 송만갑에게 「적벽가」를 배웠지만 토막소리만 부를 줄 알았다고 하는데, 「수궁가」는 남아 있는 음반이 없고, 「적벽가」는 일부 토막소리가 유성기 음반에 남아 있다. 그리고 「숙영낭자전」도 음반으로 남겼으며, 창극과 남도 잡가(민요) 등도 음반으로 남겼다.

박록주도 다른 판소리 명창과 마찬가지로 독특한 판소리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그 중 몇 가지 두드러진 특징을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박록주는 동편제 소리의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동편제는 “우조를 주장하여 웅건청담(雄建淸淡)하게 하는데 호령조가 많고 발성초가 썩 진중하고 구절 끝마침을 꼭 되게 하여 쇠마치로나 내려치는 듯이 하”여 “담담연 채소적(淡淡然 菜蔬的)”인 맛이 있고, “천봉월출격(千峰月出格)”이다. 즉, 특별한 기교를 부리지 않고 목으로 우기는 막자치기 소리로 복잡한 기교를 부리는 잔가락 없이 원박만 치는 대마디 대장단 속에 빈틈없이 사설을 채워 한 마루의 장단으로 소리 한 꼭지를 해결해 나가는 것이 동편제 소리의 특징이다. 박록주의 판소리관은 그가 창법을 비유한 말에 잘 드러나 있다.

“판소리의 창법은 인위적으로 조작해서는 안 된다. 말처럼 자연스러워야 한다. 판소리는 또한 큰 길, 좁은 길, 험한 길, 고부라진 길을 거쳐 가야 한다. 가는 도중 승지(勝地)와 절경(絶景)에 맞대하였을 때는 쉬엄쉬엄 가듯이 이때 부채를 활짝 펴들고 인간을 넘어선 초연한 기상으로 대하여야 한다.”

판소리 창법은 인위적으로 조작해서는 안 되고 자연스러워야 하며, 승지와 절경과 같은 몇몇 빼어난 대목에 국한해서 기교를 부려야 한다는 것이다. 박록주는 평생 동안 동편제 법제를 고집스럽게 지켜 왔는데, 심지어 서편제 김창환 명창에게 배운 ‘제비노정기’마저도 통성으로 맺음이 분명하게 동편제 창법으로 고쳐 불렀다. 박록주의 이러한 판소리관은 자신이 박기홍·송만갑·김정문·유성준 등 당대 최고의 동편제 거장에게 동편소리의 진수를 배웠다는 긍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선이 굵고 대쪽 같이 매서운 성격의 소유자인 그에게 골목길을 샅샅이 누비고 다니는 서편소리는 어울리지 않고, 어디까지나 큰길을 성큼성큼 걸어가다가 승지와 절경을 만나야만 잠시 머물다가 가는 동편소리와 어울리는 것이다.

박록주가 동편제 법통에 매달렸던 또 다른 이유는 창극으로 인해 크게 훼손, 변질된 판소리의 본질을 되찾고자 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박록주도 조선성악연구회 시절 창극의 주역을 맡았고, 해방 후에는 직접 여성국악동호회와 국극사를 조직하여 창극 무대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였지만, 판소리의 진정한 아름다움이 어떠한 것인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그에게 창극으로 인해 판소리가 통속화되는 현실은 감당하기 힘든 아픔이었을 것이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판소리보존연구회를 열어 정통 판소리 전승에 힘쓴 것도 회한에 찬 반성적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박록주의 소리는 고졸하지만 새겨들을수록 깊은 맛을 느끼게 한다는 점이다. 즉, 얼핏 들으면 무미건조하고 투박하지만 담백하고 구수하면서 시원한 느낌을 주는 소리이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우람한 남성적 성음을 바탕으로 동편제 창법인 통성 위주로 소리를 끌고 나가고, 군더더기 없이 분명하게 소리를 맺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징은 물론 근원적으로 그의 뛰어난 판소리 기량에 기인한 것이지만 일견 판소리에 어울릴 성싶지 않은 그의 경상도 어투도 한몫하고 있다. 그의 소리에는 아니리는 말할 것도 없고 소리에도 경상도 어투가 흠뻑 배어 있다. 그것은 적어도 박록주에게 있어서 결코 부정적인 요소가 아니다. 뛰어난 스승에게 배운 소리를 오랜 공력으로 소화하여 소리의 육질을 단단하게 다져왔기 때문에 그것은 마디나 옹이가 아니라 오히려 그의 소리를 특징짓는 아름다운 무늬와 결이 되었다.

셋째, 스승의 소리를 계승하는 데 머물지 않고 창조적 계승을 시도하였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박록주는 서른이 넘었을 때 창을 소화하면서 부를 수 있었고, 마흔이 지나서 기교가 목청을 이기고 넘게 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즉 40대까지는 스승에게 배운 소리를 그대로 부르다가 가장 좋은 소리를 낸 40대 후반에서 50대 전반 즉 1950년을 전후한 시기에 자신의 성격과 성량에 맞게 고쳐 자기만의 독특한 스타일 정립을 시도하였던 것이다. 「흥보가」의 ‘박타령’과 ‘비단타령’은 그가 새롭게 짠 대표적인 대목으로 여성적 섬세함이 돋보인다.

왼갖 비단이 나온다. 왼갖 비단이 나온다. 요간부상의 삼백척 번듯 떴다 일광단 고소대 악양루의 적성아미가 월광단 서왕모 요지연의 진상하던 천도문 천하구주 산천초목 그려내던 지도문 등태산 소천하에 공부자의 대단 남양초당의 경 좋은 데 천하영웅 와룡단 사해가 분분 요란하니 뇌고함성에 영초단 풍진을 시르릉 치니 태평건곤 대원단 염불타령 치워놓고 춤추기 좋은 장단 큰방 골방 가루다지 국화 새긴 완자문 초당전 화계상에 머루 다래 포도문 화란춘성 만화방창 봉접분분에 화초단 꽃수풀 접가지에 얼그러졌다 넌출문 통영칠 대모반에 안성유기 대접문 강구연월 격양가에 배부르다 함포단 알뜰 사랑 정든 님이 나를 버리고 가기주 두 손길 덥벅 잡고 가지 말라 도리불수 임 보내고 홀로 앉어 독수공방에 상사단 추월적막 공단이요 심산궁곡 송림간에 무섭다 호피단 쓰기 좋은 양태문 인정 있는 은조사 부귀다남 복수단 포식과객에 궁초단 행실부족의 객초단 절개 있는 송죽단 서부렁섭적 새발낭능 노방주 청사 홍사 통견이며 백랍능 흑랍능 월하사주 당포 융포 세양포 수주 통오주 경상도 황저포 매매흥정에 갑사로다 해주 원주 공주 옥구 자주 길주 명천 세마포 강진 나주 극상세목이며 한산 세모시 생수삼팔 값진 고사 관사 청공단 홍공단 백공단 흑공단 송화색까지 그저 꾸역꾸역 나오는데

박록주는 ‘박타령’도 다듬었다. 강도근의 「흥보가」에는 흥부 가족이 밥에 환장하는 모습을 매우 익살스럽게 그려내고 있다. 흥부가 밥에 포한이 되어 쌀 열한 섬으로 밥을 지으니 이리롱이, 다리롱이, 거맹이, 노랭이, 흰둥이 등 흥부의 아홉 아들놈들이 “어떻게 왼통 철환 나가드끼 나가갖고, 밥 속으로 가서 폭 백히서, 속에서 벌걱지 나무 좀 먹드끼 먹고” 나온다. 흥부도 좋아서 휘모리 장단으로 밥을 똘똘 뭉쳐 어깨 너머로 던져놓고 받아먹는다. 그러나 박록주의 「흥보가」에는 ‘돈타령’만 있고 이 대목이 없다. 워낙 재담소리라서 여성 창자로서 부르기가 무척 곤혹스럽고 부담스러워서 빼버렸을 터이다.

김창환에게 배운 ‘제비노정기’도 박록주의 개성이 크게 반영된 것으로 지금은 대부분 박록주제로 부른다. 김창환의 ‘제비노정기’와 박록주의 ‘제비노정기’ 사이에는 구성음, 사설의 부침새, 소리의 리듬꼴, 소리 맺는 방법, 발성법 등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 전반적으로 김창환의 소리가 부드럽고 밋밋한 느낌을 주는데 비해 박록주의 소리는 강하고 박진감 있는 느낌을 준다. 특히 ‘거중에 높이 떠’에서 차이가 두드러지는데, 김창환은 한 장단으로 부른 반면 박록주는 네 장단으로 부르면서 ‘떠’를 32박으로 크게 강조하였다. 그리고 선법적 양상도 서로 달라서 김창환제는 우조길로, 박록주제는 계면길로 짜여져 있다.

넷째, 박록주는 장기인 「흥보가」를 비롯하여 수많은 소리를 불렀지만 그 중에서 진수인 더늠은 단가 「백발가」와 「흥보가」의 ‘제비노정기’, ‘박타령’, ‘비단타령’이다. ‘제비노정기’, ‘박타령’, ‘비단타령’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자신의 스타일로 새롭게 짠 것이므로 다른 대목보다 단연 빼어나게 부를 수 있었고, 또한 깊은 애정을 가지다 보니 즐겨 불렀을 것이다.

백발이 섧고 섧다. 백발이 섧고 섧네. 나도 어제 청춘일러니 오날 백발 한심허다. 우산에 지는 해는 제경공의 눈물이로구나. 분수의 추풍곡은 한무제의 설음이라. 장하도다, 백이숙제. 수양산 깊은 곳에 채미허다가 아사를 헌들, 초로 같은 우리 인생들은 이를 어이 알겠느냐? 야, 야, 친구들아, 승지강산 구경가자. 금강산 들어가니 처처이 경산이요 곳곳마두 경개로구나. 계산파무울차아, 산은 칭칭 높아 있고 경수무풍야자파 물은 출렁 깊었네. 그 산을 들어가니, 조그만한 암자 하나 있넌디, 여러 중들이 모아들어 재맞이허느라고, 어떤 중은 낙관 쓰고, 어떤 중은 법관 쓰고. 또 어떤 중 다래몽둥 큰 북채를 양손에다가 쥐고, 북을 두리 둥둥, 목탁 따그락 뚝딱, 죽비는 차르르르르르르르 칠 적으, 탁좌 우에 늙은 노승 하나 가사 착복을 으시러지게 메고, 구붓구붓 예불을 허니 연사모종이라 허는 데로구나. 거드렁거리고 놀아보자.

박록주는 은퇴 공연과 그의 마지막 무대였던 고향 선산의 공연에서도 「백발가」를 불렀다. 「백발가」를 즐겨 부른 것은 노년의 쓸쓸함과 인생의 허망함을 달래기 위한 것이다. 만년에 인생무상을 읊은 「인생 백년」을 남긴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인생 백년 꿈과 같네 사람이 백년을 산다고 하였지만 어찌하여 백년이랴 죽고 사는 것이 백년이랴 날 적에도 슬프고 가는 것도 슬퍼라 날 적에 우는 것은 살기를 걱정해서 우는 것이요 갈 적에 우는 것은 내 인생을 못 잊고 가는 것이 서러 운다 인생 백년이 어찌 허망하랴 엊그제 청춘홍안이 오늘 백발이 되고 보니 죽는 것도 섧지마는 늙는 것은 더욱 섧네 인생 백년 벗은 많지마는 가는 길에는 벗이 없네 장차 이 몸을 뉘게 의탁하리 차라리 이 몸도 저 폭포수에 의탁하였으면 저 물고기와 벗이 되련마는 그러나 서러 마라 가는 길 오는 세월 인생무상을 탓하리오 어와 세상 벗님네들 이 내 한 말 들어보소 청춘 세월을 허망히 말고 헐 일을 허면서 지내보세

[박록주 명창을 기리며]

박록주는 1960년 박귀희에게 「흥보가」를 가르치면서부터 판소리 교육에 발을 들여 놓았고, 1962년 국악예술학교에 출강하면서 본격적으로 제자 육성에 나서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 내었다. 박귀희·김소희·박송희·한애순·성우향·조상현·이옥천·한농선·정성숙·조순애·박초선·성창순·정의진 등 박록주의 가르침을 받은 이들은 모두 다음 세대의 판소리를 이끌고 있는 동량들이다. 그 중에서도 박송희·한농선·정성숙·이옥천이 박록주제를 장기로 부르고 있으니 수제자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박귀희·김소희·조상현·성창순·박송희·성우향·한농선이 인간문화재로 지정되었으니 박록주라는 소리 숲이 얼마나 깊고 푸르렀던가를 짐작케 한다.

박록주 명창이 우리 곁을 떠난 지 벌써 30년이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 있다. 그가 남긴 소리로 살아 있고, 그가 가꾸고 다듬은 제자들의 소리 속에 살아 있는 것이다. 우리는 박록주라는 판소리 명창과 같은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하다. 기릴 만한 인물이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름다운 사람 박록주를 기억하고 기려야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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