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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202968
한자 朴正熙
영어의미역 Bark Jeonghui
이칭/별칭 중수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경상북도 구미시 상모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조현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정치가
출신지 경상북도 구미시 상모동
성별
생년 1917년 11월 14일연표보기
몰년 1979년 10월 26일연표보기
대표경력 대통령

[정의]

경상북도 구미출신의 군인이며 정치가.

[개설]

박정희는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현 구미시 상모동) 출신의 군인·정치가로, 호는 중수(中樹)이다. 1961년 5월 16일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이래 대한민국 제5대·제6대·제7대·제8대·제9대 대통령을 역임하여 18여 년간을 집권하였다.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중 가장 오래 집권한 박정희가 재임 기간 중 이룩한 성과에 대해서는 상반된 평가가 공존하고 있다.

재임 기간 중 경부고속국도 건설, 수출 증대, 식량 자급자족 실현, 새마을운동 등을 통한 인프라 구축으로 한국 경제의 비약적인 발전과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있는 반면,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군사 정변으로 전복한 집권 과정과 권력 유지 과정, 인권과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극심한 탄압, 친일과 좌익 경력 등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상존하고 있다.

[유년기]

박정희는 1917년 11월 14일(음력 9월 30일),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 금오산 자락에서 빈농인 아버지 박성빈(46세)와 어머니 백남의(45세)의 5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박정희의 형제로는 박동희(朴東熙), 박무희(朴武熙), 박상희(朴相熙) 등 형이 있고, 박귀희(朴貴熙), 박재희(朴在熙) 등 누나가 있다.

박정희는 10세가 되던 1926년에 구미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구미공립보통학교 시절에 1등을 하면 급장을 시켜주는 새로운 제도 덕분에 공부를 잘하던 박정희는 3학년부터 내내 급장을 맡았다. 16세가 되던 1932년에 구미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하였다. 박정희의 어린 시절과 사범학교 시절에 많은 영향을 준 인물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라고 전해진다.

[청년기]

박정희는 20세에 1936년 4월 1일 세 살 아래인 김호남과 결혼했다. 1937년 3월 20일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37년 4월 초 21세 때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1940년까지 재직하였다.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할 때 1940년 4월 1일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제2기생으로 자원 입교하였고, 1942년 3월 25일에 420명 중 1등으로 졸업하였다. 1942년 4월에 일본육군사관학교 본과 57기로 특전 입학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28세가 되던 1944년 3월 만주군 보병 제8단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고, 1945년 7월 10일에 만주군 중위로 승진하였다. 만주군 중위로 승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8·15해방을 맞았다.

[광복 후]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고 광복이 되어 한국에 돌아온 박정희는 1946년 9월 현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인 조선경비사관학교의 2기생으로 입학하였다. 1946년 12월 졸업한 후 광복을 맞은 한국 군대에서 다시 대위로 임관하여 군인 생활을 시작하였다. 박정희는 1948년 여순 14연대 반란 사건에 연루된 혐의를 받고 체포되어 군법회의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실형을 면하고 예편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소령으로 현역에 복귀하였다. 1955년에 제5사단장에 부임하였고, 1956년에 육군대학에 입교하여 이듬해인 1957년 3월 20일 졸업하고, 그 해 소장으로 진급하였다. 소장 진급 후 제6군단 부군단장으로 부임하였고, 1958년에 제7사단장에 부임하였고, 1959년에 제6관구 사령관에 부임하였다. 1960년 1월에 부산군수기지사령부 사령관에 부임하였고, 그 해 12월에는 제2군 부사령관에 부임하였다.

[군사 정변과 제3공화국]

박정희는 1960년 12월부터 제2군 부사령관을 역임할 때 김종필을 비롯한 추종 세력을 규합하였고, 이듬해 1961년 5월 16일 군사혁명위원회라는 이름으로 반공 친미, 부패 척결, 경제 재건 등을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제2공화국 장면 정권을 붕괴시켰다. 이때 그의 나이 45세였다.

1961년 5월 18일에 군사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칭하고 치안 확립과 경제 개선을 목표로 제시하였으며, 6월 10일에는 중앙정보부를 발족시키고, 7월 3일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 올랐다. 이듬해인 1962년 제2공화국 정부가 기획 중이었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실시하고 울산공업단지를 건설하기 시작하며 경제 발전을 모색하였다.

1963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15만 표 차이로 윤보선에 신승하며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65년에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 한일협정 체결 등을 통해 국가 기틀을 다질 자금을 마련했다. 1967년 다시 윤보선을 누르고 재선에 성공하여 제6대 대통령이 되었다. 1969년 3선 개헌안을 통과시키고,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을 꺾고 3선에 성공하였다. 이보다 앞선 1970년에는 새마을운동을 시작하여 농촌 개발에 주력하였다.

[10월 유신과 제4공화국]

1972년에 10월 유신을 단행해 제3공화국 헌법을 폐기하고, 긴급조치권, 국회의원 정수 1/3에 대한 실질적 임명권 등 총통에 버금가는 막강한 권한을 간선제 대통령에게 부여하는 제4공화국 헌법을 제정·통과시킨 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8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긴급조치 제1호에서 제9호를 발동하여 개헌 논의 일체를 금지하고, 정치 활동, 언론 및 표현의 자유에 심대한 제한을 가하는 등 정권 반대자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였다.

1978년에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간선으로 5선에 성공하여 제9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5개월 후 치러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집권 민주공화당이 야당인 신민당에 득표율에서 뒤지는 민심 이반의 조짐이 나타났다. 1979년에 YH여공 신민당사 점거 농성 사건, 공작 정치에 의한 신민당 당수 김영삼 제명, 그에 따른 부마항쟁, 인권 외교를 내세운 미국 카터 행정부와의 갈등 등으로 정권의 기반은 더욱 크게 흔들렸다.

1979년 10월 16일에 경상남도 부산과 마산 지역에서 반정부 항쟁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른바 부마항쟁이다. 부마항쟁을 군대를 동원해 진압한 지 1주일 후인 10월 26일에 박정희는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 참석 후 귀경하여, 궁정동에서 연회를 하던 중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저격으로 서거하였다.

[구미와 박정희]

박정희는 경제 성장과 산업 발전을 위해 과학기술 정책을 추진하였다. 1966년의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설립, 1967년의 과학기술처 신설, 1971년의 한국과학원 설립, 1970년대의 대덕연구단지 조성 등은 그 결과이다.

박정희의 과학기술 정책의 수혜는 구미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첨단산업이었던 전자공업을 수출 유망 산업으로 인식하고 대규모 산업기지를 구미에 조성하였으며, 여기에 필요한 인재 양성을 위하여 금오공과대학금오공업고등학교를 설립하였다. 작은 마을에 불과하였던 구미는 현재 첨단 산업단지를 가진 도시로 발전하였다.

한편 구미시 상모동에는 박정희 대통령 생가와 유년시절 소를 매어놓고 독서와 휴식을 하였던 공단동 소나무, 그가 다녔던 구미상모교회가 있다. 또한 구미시 광평동에는 박정희 체육관이 있으며, 한국정수문화예술원에서는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기념하는 대한민국 정수미술대전과 대한민국 정수국제사진대전을 매년 개최하고 있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관** "안중근" 님의 글은 서비스 정책에 맞지 않아 삭제되었습니다. 2014.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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