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렉토리분류

농민들의 축제 ‘꼼비기’ 먹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2A020201
지역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해평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재호

구미 선산 지역은 대략 안동 지역보다 열흘 이상 못자리를 늦게 하며, 해평 지역은 특히 선산에서도 가장 늦다. 오늘날은 대개 4월 25일 넘어서 못자리를 마련하며, 25일 동안 자라면 모를 이앙하기에 충분한 상태가 된다. 모내기는 6월 1일에서 7일 사이에 가장 많이 한다. 이렇듯 늦게 못자리를 하고 그러면서도 짧은 기간 동안에 모를 성장시켜 모내기를 할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은 지리적 조건상 들이 넓고 무엇보다도 ‘볕이 좋기(일조량이 많기)’ 때문이다.

선산문화권의 대표적인 수도작(벼농사) 문화의 특징에 속하는 꼼비기는 주로 ‘꼼비기 먹기’, 혹은 ‘꼼비기 먹는다’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못자리와 논매기를 마친 뒤에 마을단위별로 행하는 일종의 농민들의 축제이다. 그런 점에서 꼼비기는 경기도 지역의 ‘호미걸이’, 충청 지역의 ‘두레먹기’, 전북 지역의 ‘술멕이’, 전남 지역의 ‘장원내기’, 경상도 지역의 ‘풋굿’과 맥락을 같이 한다. 이들을 가리키는 용어는 지역에 따라 다양한데, 두레를 오랫동안 연구한 주강현은 그와 비슷한 지역 용어에 두레·백중·농장원·호미씻이·나다리·두레장원·장원례·음주례·길꼬냉이·파접·파결이 등이 있다고 한다. 하나의 농경세시의례에 대해 이렇게 다양한 이름들이 있는 것은 백리만 떨어져도 풍속이 서로 달랐던 우리네의 옛 문화적 특성에서 비롯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용어 중에서 표준어는 ‘호미씻이’이며, 한자말로는 풋굿이라는 뜻의 ‘초연(草宴)’이라는 말도 있고, 논매기가 끝나 이제 호미가 필요 없으므로 씻어서 걸어둔다는 의미의‘세서연(洗鋤宴)’이라는 용어도 지식층에서 통용되었다. 그리고 대개 7월 칠석이나 백중을 전후로 하기에 ‘칠석놀이’ 혹은 ‘백중놀이’라고도 하였다.

하지만 ‘꼼비기 먹기’를 호미씻이의 일종으로만 간주하기에는 해평을 포함한 선산문화권의 독특한 지역 특성이 있다. 그것은 우선 대부분의 호미씻이는 주로 논매기가 끝나는 시점에서 행하지만 구미·선산 지역의 ‘꼼비기’는 봄철 못자리를 끝내놓고도 먹는다는 데 그 차이점이 있다. 물론 못자리 뒤에 하는 ‘봄 꼼비기’ 보다는 논매기 후의 ‘가을 꼼비기’가 훨씬 규모가 컸다. 노는 기간이나 방식 그리고 음식 등에서도 차이가 있었다. 그것은 논매는 일이 못자리를 준비하는 것보다 훨씬 힘이 들어 노동력 동원 규모에서부터 기본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꼼비기’는 일년에 두 차례 하는 예들이 많았으며, 못자리 끝낸 시점과 논매기를 마친 시점에서 행한다. 못자리를 끝낸 시점에 하는 것을 ‘4월 봄 꼼비기’라 하고, 세벌 논매기를 끝내고 하는 것은 ‘7월 가을 꼼비기’라 한다. 이는 수도작 지역에서 광범하게 보이는 호미씻이의 일종이지만 그 명칭이 독특하며, 특히 선산 지역의 지역성을 잘 드러내는 농경세시행사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인재(訒齋) 최현(崔晛)의 후손인 최열 씨의 제보를 통해 해평 마을에서 행했던 꼼비기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벼농사는 파종에서 수확까지 전체적으로 5개월이 걸린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농민들이 농사일을 하는 것은 석 달이면 충분하다. 나락이 패기 시작하고, 두 세불 논매기를 마친 뒤부터 수확까지는 크게 할 일이 없어 쉬게 되기 때문이다. 이 때 농민들은 주로 겨울용 나무하기 등을 하면서 숨을 돌리는 것이 일반적인데, 꼼비기는 바로 논매기를 끝난 뒤인 7월 백중 무렵에 하게 된다. 일꾼을 두고 있는 집에서는 일꾼들에게 논매기까지 애 많이 썼다고 하여 일종의 성과급으로 쌀을 준다거나 닭을 잡아주기도 하면서 일꾼들은 한번 크게 놀리는 것이다. 일꾼들에게 있어서 이 때의 쌀은 매우 긴요하였는데, 가난한 농가의 경우 봄 곡식은 거의 떨어지고, 아직 가을 곡식은 나지 않을 때라 특히 그랬다.

일꾼들이 논매기할 때는 주로 사랑채 마루에서 모여 자는 경우도 많았는데, 꼼비기를 먹을 때도 마루에서 농악을 두드리면서 많이 놀았다. 꼼비기라는 말의 의미는 정확히 풀이할 수 없지만, 일종의 보너스에 해당하는 ‘성과급’이기 때문에 요즘의 ‘곱배기’와 비슷한 의미가 아닐까 한다.

사실 눈여겨볼 내용은 ‘먹는다’ 혹은 ‘먹기’에 대한 의미보다는 ‘꼼비기’라는 말이 어떤 뜻인가 하는 점이다. 아직까지 이에 대한 연구는 찾아보기 어려운데, ‘꼼비기’ 먹는 시기를 주목한다면 다소 그 실마리가 풀리지 않을까 한다. 그렇게 보았을 때, ‘꼼비’의 의미는 ‘뒤’를 뜻하는 고어 ‘곰’와 통하는 것으로 보인다. 못자리를 마친 뒤에 하고, 또 논매기를 마친 뒤에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꼼비기’라는 말은 중요한 일을 마치고 행하는 뒤풀이로서 일의 매듭을 짓는다는 의미가 강한 듯하다. 이렇게 보면 생업력의 마디마디에서 행하는 농경세시의례로서의 의미가 ‘꼼비기’라는 말에 잘 함축되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4월과 7월에 행하는 꼼비기 중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후자이다. 농사규모가 많은 대지주의 집안에서는 두 벌 논매기를 마치는 날 상일꾼을 깨인말(깽이말 혹은 깨이말이라고 함) 태워 주인집으로 들어가 논농사의 가장 힘겨운 과정이 잘 끝났음을 알리고 주인집으로부터 한턱 얻어먹게 한다. 깨인말은 소 등위에 걸쳐 짐을 나르는 농사도구인 걸채를 이용해 얼굴에 검정칠을 하고 삿갓을 뒤집어쓴 상일꾼을 태우는 것이다. 그리고 맨 앞에는 앞소리꾼이 ‘칭칭이’ 소리를 메기고, 그 뒤에는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고 쓴 농기(農旗)가 따르며, 풍물패들은 농악을 울리고, 일꾼들은 삿갓이나 도롱이를 벗어 흔들면서 춤을 추면서 신명나게 주인집으로 향한다. 그러면 주인집에서는 술과 음식을 대접하여 맞이하고, 일꾼들은 밤늦도록 실컷 마시고 춤과 소리를 하면서 논다.

이 날 일꾼 부리는 주인집에서는 명태를 불려서 굽고, 호박적을 구어서 호박적에 구운 명태를 올린 다음 말거나 반으로 접어서 일꾼들마다 하나씩 주었다. 이 때 일꾼들 부인들은 모두 논의 주인집에 모여 함께 음식 준비를 하였다. 그래서 일꾼들은 그때 주인집에서 하루 끼니를 모두 해결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아예 그날은 집에서 밥을 하지 않았다. 아이들까지 몰려들어 끼니를 해결하였는데, 자기 부모들과 눈도장 찍어야 음식 하나라도 더 얻어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아이들이 삽지걸이 꽉 들어찰 정도로 모여들곤 하였다.

논매기가 모두 끝나고 7월 백중 무렵에 주인집에서는 일꾼들에게 꼼비기라고 하여 무명옷 한 벌 해주고 개도 한 마리 잡아주는 예가 많았다. 주인의 입장에서는 일꾼들에게 베푸는 일종의 보너스였다. 벼농사는 논매기까지 끝내면 앞으로 그렇게 힘든 일이 없기 때문에 논매기를 끝낸 다음에 꼼비기를 먹었던 것이다. 꼼비기로 후하게 일꾼들은 대접하면 일꾼들은 평상시에도 주인이 일을 시키기 전에 각자가 알아서 집일을 하면서 주인에게 또한 보답하였다. 겨울에 땔나무가 없다시피 하면 동네 인근에는 너도나도 나무를 하여 할 나무가 없었으므로 도리사 뒷산까지 가서 나무를 해오기도 하였다.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