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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2B030101
지역 경상북도 구미시 고아읍 원호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석대권

김동주 씨는 올해 80세로 현재 원호1리에 살고 있다. 택호가 상주댁이다. 남편 고향이 상주인데 처갓집에 살게 되면서 남편의 고향을 따서 상주댁으로 불리게 되었다.

[어린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부모님]

원호리 원당골에서 5남매의 맏이로 태어났다. 어려서 아버지가 면서기로 계시면서 집안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아 친정엄마가 농사를 지었다. 마을에서 논농사는 여자가 짓지 않았는데, 아버지가 일을 하지 않으니까 할 수 없이 나서서 농사일을 도맡아 했다. 그래서 일 잘하는 사위를 더욱 마음에 들었다. 곤궁한 살림에 친정엄마가 아버지 대신 남의 농사일을 하러 다녔기 때문에 아홉 살 때부터 집안일을 했다. 기억 속에 있는 친정엄마는 매우 무서운 분이었다. 시집가서 살림을 잘해야 한다고 혼례 전에 집안 살림을 시집살림처럼 시켰다. 한번은 빨래를 해가지고 왔는데 옷에 때가 지지 않았다면서 다시 빨아오라고 옷을 패대기쳤다. 매정했던 그 모습이 꼭 마녀같았다고 한다. 그래서 남들이 듣지 않는데서 욕을 많이 했다고 한다. 친정엄마는 머리를 빗겨주다가 잘 빗겨지지 않으면 내 머리카락을 뜯어 놓을 정도로 성격이 대단했다. 농사일을 도맡아 하셔서 그런지 술도 좋아하고 성격도 남자처럼 호탕했다. 부엌일하다가 그릇 하나라도 깨면 흠씬 두들겨 맞았는데 그 때마다 아버지가 당신이 깼다고 말하라고 하시며 감싸주었다. 친정엄마에 비해 자상하셨던 아버지에게 친정엄마에게 받지 못했던 정을 받으며 자랐다. 아버지는 내 머리도 곧잘 빗겨주셨다. 시집가기 전까지 그렇게 엄했던 친정엄마가 혼례를 치른 후에는 많이 온화해지셨다. 지금도 마을 사람들이 친정엄마 ‘큰말댁’ 이야기를 많이 한다. 비록 자식들한테는 모질었지만 마을사람들에게는 인심이 후하고 덕을 많이 쌓았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친정엄마 닮았다는 말을 많이 듣는데, 첫째딸은 엄마를 닮아간다는 말이 생각난다고 한다.

[어머니가 택한 남편]

해방 된 해인 1945년 16세의 나이로 결혼을 했다. 원래 15세에 혼례를 치르려고 했지만, 그 해 운수가 좋지 않다고 해서 일 년을 묵고 음력 2월 16일에 혼례를 치렀다. 남편 이름은 이준철로 양산이씨 집안의 자손으로 9살이 많았다. 남편의 고향은 상주인데 집안이 너무 가난하여 9살에 원호리로 시집 온 고모집에 와서 25살이 되도록 고모집 농사를 봐주며 살았다. 남편은 고모집에서 일을 하면서 끼니를 해결하고 어렵게 살아서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했다. 상주에 있을 때는 굶는 것이 다반사였고 서숙(조)으로 곡기를 이었지만, 고모집 일을 봐주며 살 때는 쌀밥을 배부르게 먹을 수 있어서 살만했다고 한다. 시고모는 ‘들성김씨’ 집안으로 시집을 와서 친정엄마와 형님, 동생으로 부르던 먼 동서지간이었다. 친정엄마는 시고모 집에 있었던 남편을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했다. 마을에서 평판이 좋았던 남편은 들성 사람들이 모두 좋아할 정도로 착실하고 건실했다. 남편을 눈여겨 본 친정엄마가 혼례를 적극적으로 주선했다. 친정엄마는 남편이 남의 집을 살던 처지라 가진 것은 없었지만, 착하고 부지런한 심성 하나만을 보고 사위로 삼기로 마음먹었던 같다. 친정집에 딸만 셋이 있어서 신랑이 데릴사위로 들어온 것이었다. 신랑은 농 하나만 짊어지고 와서 혼례를 치렀다. 혼례 전에는 남편 형제들이 없는 줄 알고 예단도 하지 않고 이불과 신랑 옷만 준비했는데, 혼례 치르고 나서 시댁 식구가 많다는 것을 알았다. 남편은 7남매 중 둘째였고 시숙과 시동생에 시누이가 넷이나 있었다. 혼례 치르기 하루 전에 요객(상객)으로 시숙어른이 혼자 왔다. 혼례를 치르고 그 이튿날 남편이 시숙에게 차비를 주려고 고모집에 갔는데, 시숙이 시어머니가 내게 갖다 주라고 보낸 자미사 저고리를 팔아 차비를 했다는 것을 알고 낯 보기 싫어 그냥 보냈다. 혼례 전에 물목을 받았는데, 형편이 어려워 다 못 받았다. 그래서 남편이 살면서 마련해 준다고 했지만 그 후에도 받지 못했다. 혼례를 치르고 시댁에서 가을에 신행을 오라고 날을 잡아 보냈는데, 음력 7월 스무날에 시아버지가 지병을 앓다 돌아가셔서 신행을 다녀오기도 전에 시아버지 부고를 받고 시댁에 갔다. 시아버지가 혼례 때도 오시지 않아서 살아생전 얼굴도 못 뵙고 인사드리지도 못했다. 시아버지 부고를 알리기 위해 상주에서 사람이 왔다. 구미에서 기차를 타고 황간역에 내려서 시댁까지 걸어갔다. 여름이라 발에 땀이 차고 다 부르터서 신발을 벗고 맨발로 갔다. 가는 도중에 탄광차를 만나 얻어 타고 가면 좀 더 수월했지만 그때는 아무차도 얻어 타지 못해서 밤새 걸어갔다. 혼례를 치르고 얼마 되지 않은 터라 신랑하고 말도 잘 안하던 때였는데, 신랑이 앞서 걸어가면 말없이 묵묵히 뒤따라 갈 뿐이었다. 시댁에 도착하니 빈소를 다 지어놓았다. 3일장을 치르고 시댁에 열흘간 머무르다가 친정으로 돌아왔다.

남편과 친정엄마 사이는 유난히 돈독했다. 남편은 중풍으로 고생을 하다가 뇌혈관이 터져서 친정엄마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는데, 친정엄마가 충격을 받을까봐 식구들이 모두 그 사실을 숨겼다. 친정엄마는 아흔 살이 되도록 장수했는데, 노환으로 정신이 온전하지 못해도 남편만 찾았다. 남편의 장례는 돼지 세 마리를 잡아서 문상객들을 대접할 정도로 크게 치렀다. 양복입은 사람들은 다 원호리에 문상왔다 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문상객이 많았다. 합천 해인사 주지 스님까지 장지에 찾아왔다. 남편의 묘는 집안 종중산에 쓰지 않고 갱시골의 양산이씨 종중산에 썼다. 남편과 살면서 하도 고생을 많이 해서 죽어서는 옆에 나란히 묻히지 않는다고 했는데, 남편이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남편하고는 평생 좋은지도 모르고 운명이거니 생각하며 살았다.

[논을 팔아 자식과 남동생의 뒷바라지를 하느라 밤낮없이 일하던 시절]

남편이 데릴사위로 친정에 들어와 산 지 몇 해 안되어 친정엄마가 남동생을 낳았다. 6·25사변 한 해 전에 남동생 하나를 더 보았다. 친정엄마가 첫째 남동생을 보기 위해 온갖 지극 정성을 드렸다. 절에도 다니고 점쟁이가 시키는 비법도 행했다. 점쟁이가 나락 논에 다니며 벼 이삭을 천 개 끊고 거기에 솔잎 한 개씩을 꽂으라고 했는데, 남의 논에 다니며 하다 보니 ‘도둑년’이라는 소리도 듣고 욕도 많이 들었다. 백찜과 밥, 미역국을 준비하여 점터 보원사에 가서 공을 드리기도 했는데, 공 드리고 내려오면서 처음 마주치는 사람이 여자면 딸을 낳고, 남자이면 아들을 낳는다고 하였다. 친정엄마는 소를 한 마리 몰고가는 남자를 보았다고 한다.

남편과 살면서 육남매를 낳았다. 딸이 넷이고 아들이 둘이다. 열아홉 살에 큰 딸을 낳았는데, 올해 환갑이다. 큰딸이 막내 동생보다 나이가 많다. 둘째딸은 6·25사변이 나던 해 피난 가서 음력 9월 9일에 낳았다.

결혼을 한 후 집안 살림을 돌봤으며 남동생들 공부를 시켰다. 첫째 남동생이 태어난 후 처가살이를 끝내고 마을에 셋방을 얻어서 분가했다. 친정엄마한테 분가살림으로 사발 두벌하고 수저를 받았다. 남의 땅을 얻어 둘이 집을 지었는데, 흙으로 담을 쌓고 지붕을 얹고 소나무를 베어다 칡으로 묶어서 서까래를 올렸다. 셋방살이를 오랫동안 하여 사는 동안 열 번은 이사 다닌 것 같다.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첫째 남동생이 아홉 살이어서 상주노릇을 하지 못해 남편이 상주가 되어 장례를 치렀다. ‘평토제’를 지낼 때 남동생이 떡을 달라면서 아버지 묘 주위를 뛰어 다니는 것이 늦게 본 동생이라 어리고 철이 없었다.

살림이 곤궁하고 남동생들 공부를 시키기 위해 열 몇 살이었던 막내여동생을 공장으로 보내야 했다. 학교문턱에도 가지 못한 막내여동생은 첫째 남동생이 국민학교 졸업할 때쯤 공장에 가서 일을 하다가 결혼도 하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 하나 남은 여동생은 ‘약목’으로 시집가서 지금 칠십 몇 살이다. 첫째 남동생은 학교를 마치고 국민학교 선생님으로 있다가 서울 용산세무소에 들어갔다. 남동생들 공부시킬 때 돈이 없어서 논을 팔아 학교를 보냈다. 남동생들 뒷바라지에 자식들까지 키우느라 밤낮없이 일만 했다. 첫째 남동생이 세무사 시험을 두 번 떨어지고, 한 번은 고향집에 내려와 저녁을 먹다가 남편에게 “자형 공부 안할라요” 하니 남편이 밥숟가락을 놓고 입도 떼지 않고 그냥 나가 버렸다. 그날 밤 어디에서 돈을 구해왔는지 첫 닭 울자 아침밥을 해먹이고 남편이 남동생에게 돈을 쥐어주며 가서 공부하라고 내보냈다. 남동생은 남편의 헌신적인 뒷바라지로 세무사 시험에 합격해서 용산세무서에 일했는데, 그 후 정계에 진출했다.

남편이 장가와서 4년 동안 빚 갚는다고 ‘연분논’을 부쳤다. 남의 땅을 부치다가 어느 정도 기간이 되면 자기 땅이 되는 것을 연분논이라고 하는데, 그 때 남편 명의로 안하고 친정엄마 명의로 땅을 4마지기 마련했다. 고생하여 마련한 그 땅을 한 평에 삼백원씩 받고 팔아서 첫째 남동생 공부시키는 데 썼다. 첫째 남동생도 남편이 없었으면 우리집을 일으키지 못했을 거라고 하면서 지금까지도 고마워한다. 비록 남편이 자형이었지만 동생들이 큰 형님처럼 따르고 믿었다. ‘들성구동’에서 큰말댁 사위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헌신적으로 친정 살림을 돌보는 남편을 두고 친아들도 그 정도로 못한다고 했다. 사이가 남달랐던 남편과 친정엄마를 두고 “조선없는 사우고, 조선없는 장모”라고 했다.

자식 6남매를 키울 때 낮에는 농사일 하고 밤에는 나무를 해서 ‘문성 삼동’으로 팔러 다녔다. 나무 판 돈으로 서숙하고 소금을 사와서 끼니를 해결했는데, 너무 가난하여 겨울에 아이들 옷 한 번 따뜻하게 입히지 못하고 키웠다. 셋째였던 큰 아들을 공부시키느냐 그 아래딸은 제대로 공부도 못시켰는데, 공부에 대한 욕심이 다른 자식들 보다 유독 많아 친정엄마가 극구 반대하는데도 자기 고집대로 고등학교 시험을 치렀다. 시험 칠 때 친정엄마가 찾아가서 “기집아가 국민학교 나오면 그만이지 마카 떨어져라” 라고 할 정도였다. 그렇게 공부에 대한 열의가 높았던 셋째 딸은 시집가서 대학교에 들어갔다.

하도 궁색했던 형편이라 남편이 아들하고 딸하고 같이 쌀밥 먹으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할 정도였다. 아이들 도시락을 싸 줄때도 보리쌀을 밑에 넣고 그 위에 쌀밥을 살짝 얹어 된장을 반찬으로 싸 주었다. 먹을 게 부족하여 서숙에 소금과 서숙을 넣고 죽을 끓여먹거나 콩잎에 소금하고 서숙을 조금 넣어 끓여먹었다.

[논 팔아 준 돈을 노름으로 날린 시숙]

남편 위의 시숙어른은 일본에서 살다가 해방이 되어 왔는데, 걸뱅이처럼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맏이라서 부모를 모시고 살아야 한다고 남편에게 논 너마지기를 사달라고 해서 남편이 돈을 마련해서 시댁에 갔다. 가는 길에 강도나 험한 일을 만날지도 몰라 쌀이 두 말 정도 들어가는 자루에 베를 팔십자 정도 넣고 그 안에다 돈을 꽁꽁 숨겨 무명 팔러 다니는 장수로 위장했다. 남편이 ‘황간역’에 도착했을 때 날이 어두워 그 곳에서 하룻밤 묵어가면 괜찮았을텐데 오고갈 길이 멀어 급한 마음에 물명태 3마리를 사가지고 곧장 시댁으로 향하였다. 고개를 넘어가는데 총을 맨 세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서 길을 가로막고 어디가는지 물었다. 숨겨놓은 돈을 들키면 돈도 잃고 목숨도 잃을 것 같아서 그곳이 바람산이라 무명이 되지 않아 자루에 무명을 짊어지고 마을에 간다고 거짓말을 했더니 꼬챙이로 가차 없이 자루를 여기저기 자꾸 찔러보았다고 한다. 돈을 깊숙하게 숨겨놓아 다행히 꼬챙이에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는데, 그 사람들이 남편에게 그냥 가라면서 순순히 보내주었다고 한다. 간신히 위기를 넘긴 남편이 그 사람들에게 들고 있던 물명태 세 마리를 고맙다는 인사치레로 던져주고 삼십리 길을 정신없이 달려 시삼촌댁에 도착했는데, 어찌나 놀랬는지 식겁해서 까무러쳤다고 한다. 시댁에 돈을 건네주고 돌아온 남편의 명주 바지저고리 솜이 물에 젖은 듯 다 뭉쳐 있어 비도 안왔는데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남편이 그런 일이 있었다고 바로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아 나중에서야 그 사실을 알았다. 남편이 목숨을 걸고 넘겨주고 온 돈으로 땅을 산 시숙은 삼년도 못되어 노름 밑천으로 그 땅을 모두 팔아먹었다.

[피난도 가지 못한 6·25]

6·25사변이 나자 미숫가루 빻은 것과 짐을 싸들고 피난을 갔다. 친정아버지가 1월 그믐날 새벽에 돌아가셔 일 년 뒤 탈상을 해야 옳았지만 피난을 가야 해서 어쩔 수 없이 혼백을 산소 앞에 묻고 피난길을 떠났다. 피난길에 낙동강을 건너가야 했는데, 그날따라 강을 건너던 피난민 둘이 물에 빠져 죽는 바람에 무서워서 다시 집으로 돌아와 마을 뒷산에 있는 굴속에서 피난생활을 했다. 굴속에서 사는 동안 밤에 불도 피우지 못하고 숨어 지냈다. 밤만 되면 인민군들이 와서 눈에 띄는 남자들을 끌고 갔다. 마을 사람이 선산지서에 있었는데 그 때부터 자수하러 오라고 사람들을 종용했다. 그래서 간 사람들이 있었는데, ‘저쪽군인’들이 뚜들겨 패고 말도 아니었다. 자수하러 간 사람 중에 죽어서 온 사람들도 더러 있어 식겁먹었다. 인민군들이 후퇴할 때까지 배를 곯았다. 양식이 없어서 겨우 죽을 끓여먹었다. ‘이쪽군인’들 온 후로 굴에서 나오게 되었다. 피난을 가고 싶어도 왜관에서 철로를 끊어 놓아 가지 못했다.

[건강할 때까지 모시던 안택고사 ]

안택고사는 10월 중에 택일을 해서 지냈다. 성주님을 먼저 위하는데 제물로 떡과 나물, 김, 술, 밥 한솥을 준비한다. 신체는 바가지와 단지로 옛날 집에 살 때는 안방 농 위에 모셔두었다. 바가지는 조상삼신이 내려앉았고, 단지에는 성주를 모셨다. 신체안에 농사를 지어 제일 먼저 수확한 수지쌀을 넣고 고사를 지낼 때마다 갈아 넣는다. 묵은 쌀은 밥을 해서 먹었는데, 정성을 드린 탓인지 오래된 쌀인데도 벌레가 생기지 않았다. 조상삼신 바가지 안에는 돈 3,300원을 넣어두었다. 삼신고사를 지낼 때는 밥과 물, 미역국을 준비한다. 성주 앞에 가족들의 건강과 무사태평을 기원하는 소지를 올리고 정성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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