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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누명을 벗긴 효자 연미정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2C020402
지역 경상북도 구미시 인동동 신동(새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권삼문

효자 장석규의 일대기를 엮은 『연미정실기(戀美亭實記)』가 있다. 연미정 실기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인동 사람 장석규의 호가 연미정이다. 자(字)는 사운(師雲)이며,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후손으로 장시고(張時白皐)의 차자(次子)로 옥중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시고는 성격이 곧고 정의로워 옳은 일이 아니면 상종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당시 인동부사 이모(李某)가 자기 아버지의 생일잔치를 열어 손님을 청하여 연회를 베풀었는데, 장시고는 참석치 않았다. 또한 부사가 잔치 음식을 보내니 “임금께서 돌아가신 상중인데 어찌 이다지 무례하단 말인가. 예가 아니 음식을 내가 받을 수 없다.”고 하며 물리쳤다. 이에 부사가 앙심을 품고 중추절에 장시고가 관의 허가 없이 소를 잡아 금령을 범했다고 모함하고 위협하였다. 이에 시고의 형이 분함을 참지 못해 두 아우와 하인 몇 명을 데리고 밤에 관문을 두드렸다.

부사는 “가소롭구나, 너희가 금령을 어겼을 뿐만 아니라 관청에 침입까지 하였으니 어찌 처벌을 면할 수 있겠는가.”하고 모두 가두어 버렸다. 이 때 박모(朴某)라는 아전이 있었는데, 평소 시고에게 죄를 지어 얼굴을 들지 못하고 지내면서 시기를 하던 중이라, 부사와 아전이 결탁하여 죄목을 날조하여 감사에게 보고를 올렸다. 감사도 자세한 조사 없이 그대로 상부에 보고를 하였다.

이때는 당쟁이 심하던 때로 영남의 남인들이 중앙권력에서 밀려나 있었다. 이 사건이 비약되어 시고는 처형되고 처자는 흩어져 귀양을 가게 되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정순(貞純)왕비의 특명으로 강진(康津)의 섬으로 가족이 함께 귀양을 갔다.

이 무렵 시고의 아내 배씨가 임신 중이었고 옥중에서 석규를 낳았다. 석규는 어려서부터 남달리 영특하였으며 자라면서 집안의 내막을 듣고 그 때마다 흐느껴 울면서 원수들의 이름을 기억하였다.

섬사람들이 성격이 사납고 거칠어 과부와 고아를 업신여겼으니 장차 난폭 무례한 욕을 당할 것을 고심하다가 마침내 그러한 상황을 맞아 배씨 모녀가 바다에 몸을 던져 죽으니 그때 석규의 나이 아홉 살이었다.

양친을 잃고 고아가 된 석규는 마음속으로 “나까지 죽으면 이 원수를 누가 갚으며 또한 이 한을 누가 설욕하리오.”하고 굳은 맹세와 깊은 깨달음으로 ‘사람이란 무식하면 모든 일을 밝혀낼 수 없고 자산이 없어 가난하면 일을 감당하기 어려우니 부지런히 글을 배우고 돈을 모아야 한다.’고 작심하여 열심히 일을 하고 학문을 하여 경사(經史)를 통달하였다.

이렇게 자립을 하여 귀양살이하는 상황에서도 버젓한 가문에 장가를 들었다. 그는 부모의 한을 생각하여 평소에 소찬으로 밥을 먹고, 자리도 깔지 않고 잠을 잤으며,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밤마다 산골짜기에 들어가서 목욕하고 기도를 드렸다.

심지가 굳어서, 한번은 옴이 올랐는데도 아무리 가려워도 한번도 긁지 않아 옴이 저절로 나았다고 한다. 또 학질이 걸렸을 때는 의관을 정제하고 단정히 앉아서 지내어 학질이 저절로 나았다고 한다.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기원(琪遠)이라고 하였다. 아들이 열다섯 살이 되자 서울로 보내어 임금의 거둥이 있을 때마다 행차 앞에 엎드려 억울함을 호소하게 하였다. 같은 귀양지에서 지내다가 복직된 이들의 도움과 특히 임금의 장인인 김문근(金汶根)이 임금에게 아뢰어 마침내 누명을 벗게 되었다.

하지만 석규는 병이 들었고, 병중에서도 그 모친과 누이의 무덤을 고향으로 옮길 뜻을 글로 지었는데 그 사연이 비절하여 보는 이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병이 깊어 부인 차시가 손가락을 끊어 피를 입에 넣자 “죽고 사는 것은 천명이니 부인의 손가락을 끊게 하는 것은 남자의 도리가 아니오.”라는 말을 남기고 한 많은 세상을 떠나니 철종(哲宗) 12년 3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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