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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운용 선정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200903
한자 柳雲龍善政碑
영어의미역 Monumental Stone of Yu Unyong
이칭/별칭 현감유후운용선정비(縣監柳侯雲龍善政碑)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경상북도 구미시 임수동 409-3[수출대로 335]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박재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금석각류|선정비
양식 일반형 비석
건립시기/일시 1590년연표보기
관련인물 유운용(柳雲龍)
재질 화강암
높이 255㎝
너비 84㎝
소재지 주소 경상북도 구미시 임수동 409-3[수출대로 335]지도보기

[정의]

경상북도 구미시 임수동에 있는 조선 시대 인물 유운용의 선정비.

[개설]

유운용의 본관은 풍산(豊山)이며, 자는 응견(應見), 호는 겸암(謙菴)이다. 임진왜란 때 영의정으로 국난 극복에 공을 세운 유성룡(柳成龍)의 형으로 퇴계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모든 경사(經史)를 통독함으로써 사문의 촉망을 받았다.

1572년(선조 5) 친명(親命)으로 음사(蔭仕)를 받아 전함사별좌(典艦司別坐)가 된 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생인 영의정 유성룡선조에게 유운용을 해직시켜 모친을 구출하도록 해달라 읍소하자 이 건의가 받아들여져 어머니를 비롯한 온 가족이 모두 무사하게 되었다. 이에 사람들이 유운용의 효심을 칭찬하였다. 유운용은 군국기무(軍國機務)에 관한 소를 올려 선조로부터 인정을 받아 조의(朝議)에서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후에 문경(文敬)의 시호를 받기도 하였다.

[건립경위]

유운용은 1585년(선조 18)에 인동현감으로 부임하여 1590년(선조 23)에 이임하였다. 그는 인동현감으로 재임하면서 백성들에 선정을 베풀었을 뿐만 아니라 야은 길재와 관련하여 오산서원지주중류비를 세우는 등 특히 교육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백성들이 이를 기려 선정비를 세웠다.

[형태]

귀부에 높이 147㎝, 너비 84㎝, 두께 22㎝의 비신을 세우고 그 위에 하엽(荷葉)을 얹은 형태다. 하엽은 높이 67㎝, 너비 110㎝, 두께 34㎝이며, 귀부는 높이 41㎝, 너비 165㎝, 두께 190㎝이다.

[금석문]

비의 앞면에는 ‘현감류후운룡선정비(縣監柳侯雲龍善政碑)’라 새겨져 있고, ‘황명만력십팔년구월(皇明萬曆十八年九月)’이라 기록되어 있어 이 비석이 1590년(선조 23)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현황]

구미시 임수동 인동향교 입구에 인동의 각지에 산재해 있던 역대 현감과 부사의 선정비, 불망비, 거사비 등의 비석을 옮겨와 정돈해 놓은 곳에 세워져 있다.

[의의와 평가]

인동향교 입구 앞쪽 비석군을 찾는 사람들에게 올바른 공직자 상을 생각하게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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