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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201284
한자 李彦迪
영어음역 Yi Eonjeok
이칭/별칭 이적(李迪),복고(復古),회재(晦齋),자계옹(紫溪翁),문원(文元)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구미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용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인동현감
출신지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성별
생년 1491년연표보기
몰년 1553년연표보기
본관 여강
대표관직 좌찬성

[정의]

조선 전기 인동현감을 역임한 문신.

[가계]

본관은 여강(驪江). 초명은 이적(李迪),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자계옹(紫溪翁). 할어버지는 참군 이수회(李壽會), 아버지는 이번(李蕃), 어머니는 계천군(鷄川君) 손소(孫昭)의 딸로 경주손씨(慶州孫氏)이다. 경주손씨 가문은 일찍이 경주 양동에 자리 잡은 세력으로, 손소 손중돈(孫仲暾) 등 현달한 관료를 배출하였다.

[활동사항]

이언적은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외가의 사랑채인 서백당(書百堂)에서 태어났다. 1514년(중종 9)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24년 6월 인동현감으로 부임하여 1526년 7월 사헌부지평으로 전임했다. 인동현감 재임 중 공무가 끝나면 때때로 죽림정사(竹林精舍)를 방문하여 죽정(竹亭) 장잠(張潛)과 학문을 강론하였다고 하는데 구미시 황상동에 있는 이현암(二賢巖)이 바로 강론의 장소였다고 한다. 그 후 밀양부사, 전주부윤, 경상도관찰사, 한성판윤, 이조판서, 형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좌찬성에 이르렀다. 1547년 (명종 2) 양재역(良才驛) 벽서 사건으로 강계로 귀양을 가서 저술 작업을 하다가 유배지에서 죽었다.

[학문과 사상]

이언적은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성리학자로, 특히 그의 주리(主理) 학설은 퇴계 이황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28세 때 조한보(曺漢輔)와 여러 차례에 걸쳐 논쟁한 소위 ‘무극(無極)·태극(太極)의 설’은 조선 초유의 대논쟁이라고 평가된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회재집(晦齋集)』,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1549), 『구인록(求仁錄)』(1550),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1553), 『봉선잡의(奉先雜儀)』(1550) 등이 있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연일읍 달전리 산81-1번지에 신도비와 함께 있다. 신도비는 2006년 1월 2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76-2호로 지정되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문원(文元)이며, 선조 때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1610년(광해군 2) 경주 옥산서원(玉山書院)에 배향되었으며, 문묘(文廟)에 동방오현(東方五賢)의 한 사람으로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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