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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통동 도선굴 통로 기문 암각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201445
한자 南通洞道詵窟通路記文岩刻
영어의미역 Petroglyphs Written with Pathway at Doseon Cave in Namtong-dong
분야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경상북도 구미시 남통동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영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금석각류|암각|명문
건립시기/연도 1937년
관련인물 김승동
높이 도선굴 통로 기문 1.3m|금오산 굴 통로기 48㎝
길이 도선굴 통로 기문 1m|금오산 굴 통로기 70㎝
면적 도선굴 통로 기문 1.3m×1m|금오산 굴 통로기 70cm×48㎝
소재지 주소 경상북도 구미시 남통동 금오산 도선굴지도보기
소유자 경상북도 구미시

[정의]

일제강점기에 경상북도 구미시 남통동 도선굴 암벽 두 곳에 새겨진 글자.

[개설]

남통동 도선굴 통로 기문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천석통로(穿石通路)라는 내용의 도선굴 통로 왼쪽 수직 암벽에 새긴 암각문이고, 다른 하나는 도선굴 내부 돌출된 벽 위에 고정시킨 금오산 굴 통로기(金烏山窟通路記)라는 제목의 직사각형 판석(板石)의 명문(銘文)이다.

[건립경위]

금오산 굴은 금오산의 빼어난 경치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곳이지만, 절벽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어 올라가 볼 수 없었다. 이를 아쉬워하던 구미면장 김승동(金昇東)이 1937년 봄 금오산 중턱 절벽 한가운데 위치한 도선굴로 올라가는 통로를 만들고자 뜻을 내니,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찬성하였다. 이에 암벽의 돌을 깎고 쇠줄을 연결해서 굴에 이르는 통로를 만들고, 이 과정을 후세에 알리기 위해 도선굴 통로 기문과 금오산 굴 통로기를 새기게 되었다.

[위치]

도선굴은 현재 경상북도 구미시 남통동 금오산 중턱 450m 지점의 절벽에 위치한다. 금오산도립공원 매표소를 지난 지점에서 케이블카를 타면 승려 도선(道詵)이 세웠다고 하는 해운사(海雲寺)에 다다른다. 해운사 모퉁이를 돌아 5분쯤 오르면 높이 28m의 거대한 대혜폭포(大惠瀑布)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쏟아지는데, 이를 왼쪽으로 두고 다시 오른쪽으로 돌면 바로 도선굴 통로인 절벽 밑에 이른다. 도선굴 통로 기문도선굴 입구 통로 암벽에 새겨져 있고, 금오산 굴 통로 기는 도선굴 내부의 오른쪽 돌출된 벽 상부에 판석으로 박혀 있다.

[형태]

남통동 도선굴 통로 기문도선굴 통로의 자연 암벽 표면에, 통로에서 2m 정도 높은 위치에 새겨져 있다. 글자는 한자 해서체(楷書體)로서 15~30㎝ 크기이며, 3행에 총 11자가 음각되어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도선굴 통로 기문은 자연석 암벽에 제목 없이 글자만 새겼는데 그것은 “천석통로(穿石通路: 돌을 깎아 길을 통하게 하다) 구미면장(龜尾面長) 김승동(金升東).”이라고 되어 있다.

금오산 굴 통로기는 도선굴 내부의 작은 동굴 입구 벽 위에 가로 70㎝, 세로 48㎝의 다듬은 판석에 해서체로 새겨져 있으며, 글자 수는 세로 24행, 가로 각행 15자로 총 341자이다.금오산 굴 통로기도 역시 구미면장 김승동이 지은 것으로, 제목은 금오산 굴 통로기이고 내용은 도선굴을 비롯한 빼어난 자연 경관과 굴 통로를 만들게 된 동기 등을 설명하고 있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금오산은 선산의 진산으로 군의 남쪽 40리에 있다. 옛날 고려 말에 야은 길재 선생이 절개를 지켜 돌아와 산 아래에 은거하니 이후로 산이 더욱 드러났다. 전해오는 말에 대각국사가 이 산을 보고 ‘중국의 숭산과 닮았다.’ 하여 남숭산이라 일컬었다고 한다. 산은 빼어난 곳이 많다. 그 가운데 가는 폭포와 큰 폭포가 있는데, 큰 것은 온 산의 물이 합쳐져 오기 때문에 그 폭포가 떨어지는 곳은 자연스레 못을 이룬다. 가는 것은 절벽으로부터 수백 척을 내려오는데, 물은 적지만 형세는 높기 때문에 떨어지는 비를 흩뿌려 그 곁을 적신다.

큰 굴이 있는데 벽의 3분의 2 위에 있어 볼 수는 있으나 오를 수가 없어 항상 유람하는 사람들의 한이 되었다. 선산군지에 승려 도선이 굴 속에 집을 지은 일이 있다고 한다. 그 후에 우리 선조 욕담 선생이 또한 굴에 피난하여 일찍이 그 못에서 목욕하고 나서 스스로 욕담이라 하고, 이끼 낀 벽에 두 글자를 새겼는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자취가 완연하다. 대체로 당시에 절벽을 어떻게 출입했는지 알지 못했다. 정축년 봄에 내가 길을 열겠다는 뜻으로 의견을 내니 많은 사람들이 모두 동의하였다. 이에 측벽으로부터 돌을 깨고 쇠줄을 연결해서 굴과 통하게 하고 측량하니, 높이는 21척이고 넓이는 24척이며 길이는 25척이나 되었다.

아직 기와 조각과 쇠그릇이 묻혀 남아 있으니, 먼저 간 사람의 자취가 분명하다. 그러나 산의 형상이 변해서인지 혹 호사자가 훼손한 것인지 잘 알 수 없다. 길이 통하게 된 후에 시인이나 유람하는 사람의 왕래가 끊이지 않아 마침내 한 풍경을 더하여, 모두 “이 공로를 기록하지 않을 수 없다.” 하니 내가 외람되이 면장에 있으면서 사실 이 일을 주관하였으니 이를 돌에 새겨 후에 오는 사람에게 보여서 경치의 한 역사를 기록하게 하노라. 면장 김승동이 기록하다.”

[현황]

도선굴 통로 기문은 수직 암벽 면에 음각되어 있어 자연 풍화에 노출되어 있으나 상태는 아직 양호하다. 금오산 굴 통로기는 도선굴 내부에 있지만 위치가 높아 사람손이 닿을 수 없을 뿐 아니라, 판석의 재질이 오석이어서 잘 보존되고 있지만 기문 말미의 ‘연월일’이 고의로 훼손된 상태이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昭和 十二年 四月日"(소화 12년 4월일)이라 새겨져 있어 1937년 건립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도선굴 통로 기문과 금오산 굴 통로기는 비지정 문화재이고, 도선굴과 함께 구미시 금오산도립공원 관리사무소에서 관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금오산 도선굴은 신라 말기 도선, 고려시대의 대각국사(大覺國師), 조선시대의 야은(冶隱) 길재(吉再) 등이 찾아 은거할 만큼 절경이었지만 제대로 오를 수 있는 길이 없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구미면장의 노력으로 오늘날 누구나 이곳에 올라 금오산도선굴의 비경을 한눈에 즐길 수 있게 되었는데, 이는 도선굴 통로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통로 기문은 이 통로가 만들어진 내력을 잘 밝혀주고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4.11.04 건립시기 및 [현황] 수정 <변경 전> 1937~1938년경 / 있다. 그러나 기문 말미의 ‘연월일’이 고의로 훼손된 상태여서 건립 시기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변경 후> 1937년 / 있지만 기문 말미의 ‘연월일’이 고의로 훼손된 상태상태이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昭和 十二年 四月日'(소화 12년 4월일)이라 새겨져 있어 1937년 건립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용자 의견
심** 통로기문 내용 중간에 "歲 丁丑 之春 開路(세 정축 지춘 개로)"라는 글자가 보이네요.정축년(1937년) 봄에 굴 통로를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기문 말미의 연월일이 훼손되어 잘 안 보이길래 사진기로 확대해서 찍어보니 "昭和 十二年 四月日"(소화 12년 4월일)로 적혀 있네요.일본연호라서 지운 것 같네요.
  • 답변
  • 디지털구미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당 부분 확인 후 수정 보완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2014.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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