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4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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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宋軼 |
영어공식명칭 | Song Jil |
이칭/별칭 | 가중(可仲),숙정(肅靖)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서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병호 |
[정의]
조선 전기 대구에서 활동한 문관.
[가계]
송질(宋軼)[1454~1520]의 본관은 여산(礪山)이며, 자는 가중(可仲)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송진생(宋辰生)이고, 할아버지는 송만달(宋萬達)이다. 아버지는 도정 송공손(宋恭孫)이고, 어머니는 박겸형(朴謙亨)의 딸 밀양박씨(密陽朴氏)이다. 부인은 양원(梁援)의 딸 남원양씨(南原梁氏)이다.
[활동 사항]
송질은 1477년(성종 8)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한 뒤 친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482년에는 진현시(進賢試)에 발탁, 홍문관정자를 거쳐 1485년 사헌부지평이 되었다. 1486년 충청도·경상도·전라도를 돌며 각 역(驛)의 찰방과 역승(驛丞)의 불법한 일을 살피기도 하였다. 1496년(연산군 2) 우승지를 거쳐 황해도관찰사로 부임하여 역질(疫疾)을 잘 퇴치하여 좋은 평가를 받았다. 1499년에는 평안도관찰사로 부임하여 북방의 국경 지역을 다스렸다. 1501년 도민 임지성(林之盛)의 변란을 사전에 파악하고 진압하였으며, 그 공로로 형조참판에 승진되었다.
송질은 1501년 천추사(千秋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온 뒤 공조·호조·이조의 참판을 역임하였다. 1504년 예조판서에 이어 형조판서와 경기도관찰사를 지냈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 때 예조판서로 있으면서 공을 세워 정국공신 3등에 녹훈되고 여원군(礪原君)에 봉군되었다. 1509년 함경도체찰사, 1512년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이 되었다. 1513년에는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으며, 여원부원군(礪原府院君)에 책봉되었다. 1520년 사망하였다.
[묘소]
송질의 묘소는 경기도 양주시 은현면 선암리 산15-23에 있다.
[상훈과 추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