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C0101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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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인동동 신동(새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권삼문 |
천생산은 해발 406m의 낮은 산이지만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낙동강을 바라보는 위치에 있다. 마주보는 금오산(976m)과 함께 지역 일대에서 예로부터 중요한 산으로 여겨왔다. 낙동강 쪽에서 산을 바라보면 산 정상이 일(一)자로 보여 ‘방티산’이라 불렸다고 한다.
비교적 작은 산이지만 구미시 인동, 장천면, 칠곡군 가산면에 걸쳐 있으며, 단애와 절벽이 둘러친 곳이 많아 천연의 요새로 일컬어 왔다. 특히 삼국시대부터 산성이 축조되었다고 하며 조선시대에는 산성의 중요도에 따라 인동지역의 중요성이 오르내렸다.
조선후기의 관찬읍지(관에서 편찬한 읍지)인 『인동부읍지』는 천생산의 위치와 산성에 대한 내용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인동부 동쪽 8리에 위치하고 있다. 유학산(留鶴山)으로부터 와서 산성(山城)이 되었다.’
조선후기의 사찬읍지(개인이 편찬한 읍지)인 『옥산지』에서도 천생산의 위치와 산이름이 형상에서 유래한다는 내용을 싣고 있다.
‘천생산(天生山)은 고을 동쪽 8리 거리에 있는데 삼면에 석벽을 깎아 세워 성을 만들고 있는 것이 ‘하늘이 만든 것 같은’ 까닭으로 천생산이라 이름 붙였다.’
또한 천생산(天生山)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산성이 있어서 그 중요성을 더한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가 처음 쌓고 임진왜란 때 곽재우가 왜적을 맞아 싸웠다고 전해오는 천생산성은 현재 칠곡군과 연접되어 있으며, 경상북도 기념물 제12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삼면이 절벽을 이루어 험준한데 동서축만은 비교적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데 이 동서축면에 남북으로 약 1㎞의 자연할석(自然割石)으로 석벽을 축조한 천연의 요새이다.
성 안에는 우물 하나와 연못 두 곳이 있으며, 동·남·북의 3개 문지 중 남문지는 붕괴되었고 북문 또한 일부가 붕괴되었으나 동문지는 원형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잘 남아 있다.
천생산성의 성벽과 성문지는 임진왜란 후 그 중요성이 다시 인정되어, 1596년 인동현감 이보(李甫)에 의하여 수축되었고, 1601년과 1604년에도 관찰사 이시발과 찰리사 곽재우에 의하여 수축된 것이다. 삼국시대의 산성 양식을 가지고 있으며, 삼국시대 고분군과 이웃하고 있어 삼국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성안에는 장대(將臺)·군기고(軍器庫)를 비롯하여 만지암(萬持庵) 등의 건물이 있었으나 모두 없어지고 지금은 성벽·동문 등만 남아 있다. 조선시대에는 별장(別將)이 배치되어 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던 유서 깊은 산성이다.
천생산(天生山)에 위치하고 있다. 사면이 석벽(石壁)을 깎아 세운 듯하여 성(城)을 만드니 하늘이 만든 것 같은 까닭으로 이름을 붙였다. 가운데에 두 개의 못이 있다. 신라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처음으로 쌓았고 만력(萬曆) 갑진(甲辰, 1604)에 더 쌓았고, 임진왜란 때 곽재우(郭再佑)가 왜구를 크게 격파하고 왜인들의 병기인 조총(鳥銃), 창(槍), 화살[矢], 진천뢰(震天雷)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물건들을 많이 얻었다. 지금까지도 성 가운데 남아 있다. 만력 신축(辛丑, 1601)에 곽재우가 찰리사(察理使)로서 왕에게 아뢰어 외성(外城)을 쌓으니 둘레가 3,622척(尺)이었다. 별장(別將)과 승장(僧將)이 군량을 지켰다. 관문(官門)에서 성안의 못까지 서로 떨어진 거리가 동쪽으로 10리(里)이다.
천생산성 은 고을 동쪽 8리에 있는데 한 떨기 높은 산봉우리가 하늘에 솟아 천길 석벽이 삼면을 깎아 세워져 원숭이라도 무엇을 붙잡고 오를 수 없는 곳이며 땅 길로도 통할 수 없는 곳이다. 다만 동쪽 치우친 곳에 겨우 사람이 다닐 길을 내고 있으니 진실로 한 장부가 길을 지키면 만 사람도 함락시킬 수 없는 곳이다.
신라 시조 혁거세가 처음으로 동쪽 치우친 곳에 성을 쌓은 이래로 앞뒤로 크게 성을 쌓은 사실이 『옥산지』에 실려 있다. 만력 연간의 임진란에 명나라 총병 유정이 여기에 진을 치고 머물면서 여러 번 큰 공을 세웠는데 왜군에게서 노획한 곡자(哭子), 총자포(銃子砲), 진천뢰대거(震天牢大車), 승창일(勝槍釰) 등 물건들은 지금도 성안에 감추어져 있다.
갑신년(1584)에 이르러 찬획사(贊劃使) 이시발(李時發), 찰리사(察理使) 곽재우(郭再佑)가 임금께 아뢰어 청하여 외성을 더 쌓으니 둘레가 3,612척이고 가운데는 네 개의 연못이 있었다. 서쪽에는 넓은 바위가 있었는데 밀덕(密德)이라 하였다. 반공(半空)에 비스듬히 걸려 있으면서 아래로 땅 없는 곳을 굽어보고 있다. 사람이 비록 올라 굽어보지만 그 가장자리엔 가까이 갈 수 없다. 또 절이 있어 승려들이 여기에 살고 있다. 그런 까닭으로 별장 한 사람과 승장 한 사람을 두었다.
총령성사 방백 민시중이 임금께 아뢰어 청하여 동쪽 치우친 곳에 성을 더 쌓았는데 동구는 쌓아 완성하지 못하였으니 식자들은 그것을 한스럽게 여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