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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2384
한자 冲菴金先生謫廬遺墟碑
영어음역 Chungam Kim Seonsaeng Jeongnyeo Yuheobi
영어의미역 Memorial Stone for Kim Jeong
분야 종교/유교,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1동 1421-1[오현길 75]지도보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홍순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유허비
건립시기/일시 1852년연표보기
관련인물 김정|백희수|임백연
높이 200㎝
너비 73㎝
소재지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1동 1421-1[오현길 75]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1동에 있는, 조선 중기 제주에 유배되었던 김정의 행적을 기리는 비.

[개설]

김정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중종 때 대사헌·형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조광조와 함께 미신을 타파하고 향약을 시행하는 일 등에 힘썼으나 기묘사화 때 제주로 귀양 왔다가 1520년 사사되었다. 충암 김선생 적려유허비는 김정의 사후 3백여 년 뒤인 1852년에 세운 것으로, 제주에서의 자취를 기리기 위해서였다.

[건립경위]

충암 김선생 적려유허비는 1852년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귤림서원 묘정비(1850)가 세워진 뒤이다. 적려유허비를 세운 경위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1979년 9월 26일 제주도에서 새로 세운 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쓰여 있다.

"이 비는 충암 선생이 적거했던 제주시 일도2동 가약천 동쪽에 세웠던 것으로, 그 후 비신 하부가 파손된 상태로 1백여 미터 거리인 이 곳에 옮겼던 것을, 이번 선생의 16대 종손 김원식(金元植), 13대손 김병모(金秉模)와 김기봉(金基鳳) 등 여러 후손의 추진으로 다시 복원하여 세우게 된 것이다. 1979년 9월 26일, 제주도”

[위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 1동 1421-1번지 오현단 안에 세워져 있다.

[형태]

충암 김선생 적려유허비는 비신이 동강나서 아래쪽은 유실된 상태이다. 이 때문에 확실한 것을 알 수 없지만, 전면의 너비가 73㎝, 두께가 23㎝인 점을 고려하면 전체 높이는 200㎝ 안팎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금석문]

전면에는 '충암김선생적려유허비(冲菴金先生謫廬遺墟碑)'라고 쓰여 있고, 후면에는 유실된 글자가 많아 정확한 뜻을 해독하기는 어려우나, 당시 목사로 재직하던 백희수가 1852년 11월에 김정이 살았던 집터에 유허비를 세웠다는 내용이 쓰여 있다. 글을 쓴 사람은 판관 임백연이다. (城東南隅 嘉樂川之邊 有井曰判書井 卽(先生) 謫居之遺墟也 井則有碣 墟則無碑 歲月(玆久 廬)有遺躅之湮沒 命院儒姜埼奭幹事 伐石(而竪 連)閣而庇 以寓慕賢之意 噫 先生之名德(事實 畧) 載於萬曆[代]戊寅立廟[記] 今不贅擧云爾 上之三年壬子十一月日 牧使白希洙識 判官任百淵書)

[현황]

충암 김선생 적려유허비는 현재 아래쪽은 없어지고 상반신만이 남아 있는 상태이다. 비각은 오래 전에 사라졌고, 지금은 비신마저 훼손되어 그 형태를 알아보기 어렵다. 비명도 하부의 것은 알 수 없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김정은 1520년(중종 15) 8월 지금의 오현단 부근 금강사에 유배되었다. 이곳에서 사사될 때까지 거의 1년여 동안 적거하면서 제주 유림들에게 학문과 제사의 예법을 가르쳐 주었고, 음사를 숭배하는 악풍을 교도하였다.

또한 「한라산 기우제문」과 「수정사 중수기」 등의 제문과 많은 시 작품을 남겼는데, 특히 김정이 저술한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은 당시의 제주 사회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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