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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2802
한자 三乙那
영어음역 Sameulna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시대 고대/삼국 시대
집필자 허남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탐라국 건국 시조
출신지 제주 제주 삼성혈
성별
생년 65년연표보기
본관 제주

[정의]

탐라국의 건국 시조이자 삼신인(三神人).

[개설]

삼을나는 고을나·양을나·부을나의 세 사람을 부르는 명칭으로, 이들은 각각 제주고씨(濟州高氏), 제주양씨(濟州良氏)[후에 梁으로 바꿈], 제주부씨(濟州夫氏)의 시조이기도 하다.

『고려사(高麗史)』 지리지의 삼을나와 관련한 기록을 보면, “태초에 사람이 없더니 고을나·양을나·부을나 세 신인(神人)이 땅에서 솟아나 가죽옷과 고기를 먹고 살다가, 상자에 담겨 벽랑국에서 온 세 여신을 서차에 따라 배필로 삼았다.세 여신은 오곡 종자와 송아지와 망아지를 가져왔으므로 농사를 시작하여 땅이 풍요로워졌고, 세 신인은 1도·2도·3도로 나뉘어 살게 되었으니, 이것이 탐라국 개국의 토대가 되었다.”라고 되어 있다. 제주 지역에서 전해 내려오는 「삼성신화와 삼공주」 신화에는 이들이 모흥혈(제주 삼성혈)에서 솟아 나온 것으로 되어 있다.

[가계]

‘을나’라는 뜻은 (良乙那), (高乙那), (夫乙那)의 한자 표기로, 각각 신성, 광명, 통어의 뜻에 인격을 표시하는 ‘네’가 붙은 것이라는 이은상의 견해가 있다. 현용준은 고을나는 ‘높은이’. 양을나는 ‘어진이’, 부을나는 ‘밝은이’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장주근은 ‘을나’가 얼라·알라·얼레로 남부 지방에 널리 분포하는 소아(小兒)의 방언, 또는 고어를 한자 표기로 옮긴 것이라고 하면서,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오는 김알지의 알지는 소아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이는 곧 신성한 아이의 탄생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탐라기년(耽羅紀年)』(1918)에서는 '향언왕(鄕言王)'이라는 정의에 따라 을나가 우리말로 왕 즉 통치자의 의미라고 했다.

고을나양을나, 부을나의 고·양·부는 본래 성일 수 없고, 그것 자체가 한자의 차자 표기이거나 후대(고려 시대)에 만들어 낸 이름일 가능성이 높다. 선사 시대에서 고대 국가 건설기에 우리나라에는 성씨가 없었기 때문이다. 왕족들은 고대 국가 이른 시기에 성씨를 갖게 되었고, 고려 초기까지 지방 세력가인 호족들도 일부를 제외하고는 성씨를 붙이고 있지 않다.

6세기 중반의 국내외 사료를 보더라도 고, 양, 부는 나타나지 않는다. 『일본서기(日本書紀)』의 “耽羅王子 久痲伎”나 “耽羅王子 久痲藝”의 구마(久痲)는 성씨보다는 ‘곰’이나 ‘검’의 신적인 존재라 하겠다. 7세기경 일부 탐라 왕자들이 스스로를 구마(久痲)라고 지칭한 것은, 당시 탐라국에 막연한 씨족 개념을 가진 공동 집단에서 혈통 중심의 친족 집단으로 가계가 분리되었음을 의미한다.

666년 일본에 파견된 왕자 고여(枯如)가 9년 후인 675년에 탐라왕으로 다시 일본을 방문하고 있는 것을 통해 일정한 친족 집단 내부에서 왕위가 계승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곧 7세기 즈음에 탐라가 가계 중심의 사회를 구성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고려 전기인 현종 대에 고씨가 등장하고, 문종 대에 고한(高漢)과 고협(高叶)이 등장하는 것으로 미루어 고씨 성은 문종 이후에 확립된 것으로 보인다. 양씨나 부씨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활동사항]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는 제사와 행정·군사와 농업을 주재하는 각각의 신격의 의미를 지니면서, 제사 집단·군사 집단·생산 집단이라는 세 기능을 분담하는 부족의 우두머리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세 집단은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 세 신인을 추장으로 내세워 함께 연맹 체제를 구축하고 고대 국가를 건설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묘소]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가 탄생한 곳으로 알려진 제주 삼성혈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동에 있다. 세 신인의 묘소는 알 수 없고, 다만 이 성소에서 매년 4월 10일과 10월 10일에 춘추대제가 거행되고, 12월 10일에 건시대제가 행해진다.

제주 삼성혈의 성역화 사업은 1526년(중종 21) 제주목사 이수동(李壽童)제주 삼성혈 북쪽에 홍문(紅門)·혈비(穴碑)를 세우고 돌로 280여 자의 담을 쌓아 고·양·부씨의 후손들에게 혈제(穴祭)를 지내게 하면서 시작되었다.

1698년(숙종 24) 혈 동쪽에 위패를 모시는 삼을나묘(三乙那廟)[지금의 삼성전]를 세우고, 1827년(순조 27)에는 제향을 받드는 전사청(奠祀廳)을 세운 뒤 1849년(헌종 15) 숭보당(崇報堂)을 세워 오늘에 이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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