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T01007 |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도2동 |
집필자 | 문순덕 |
제주농업학교의 위상
김홍식의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제주농업학교는 일본사람은 무조건 합격하고, 한국사람은 시험을 보는데 각 처에서 왔다고 한다. 제주도뿐만 아니라 전라남도 완도, 진도, 영안 등지에서 입학하러 왔었다. 그 당시만 해도 전라남도에 중등교육기관이 없었고 제주도에 을종(나중에는 5년제 갑종으로 승격했음)인 농업학교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모집 정원도 농과·축산과 해서 120명밖에 안 되었다. 그 나머지는 목포 상업학교에 입학하기도 했다. 목포소학교는 일본인과 한국인이 같이 다녔던 공학이라 했다.
일제강점기에 제주농업학교에 들어가기가 요즘 서울대학교에 입학하는 것과 맞먹을 정도로 어려웠다고 한다. 제주농업학교는 중학교 과정인데, 일제강점기에 중학교 과정이라는 것이 학제가 다양했다. 초창기에는 학제가 여러 가지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5년제였다. 그런데 실업학교에 해당하는 농업학교, 상업학교, 공업학교가 있었으며 전부 5년제였다. 그 당시 학제를 보면 갑종이면 5년이고, 을종이면 3년제여서 제주도에는 농업학교가 있는데 그것도 중학교는 없고, 실업학교에 해당하는 농업학교도 을종인 3년제였다. 그러니까 제주도 학생들은 을종인 농업학교를 졸업하고 광주로 진학했다. 광주농업학교는 갑종 5년제에 해당하니까 이 학교에 편입해서 2년을 더 다니고 졸업하면 고등학교 학력을 이수하게 되었다. 여건이 허락해야 이렇게 학창생활을 할 수 있었으며 대학에 입학한다는 것은 아주 어렵고 드믄 일이었다고 한다.
중학교 입학시험
김홍식이 북국민학교에 다닐 때는 한 학년이 세 반 70명씩 210명 정도였다. 여학생도 한 반이 있었지만 분리되어서 서로 잘 교류하지 않았다고 한다. 김홍식이 국민학생때는 남학생이 3반이지만 정규 학생은 1, 2반이고 3반은 나이 많은 학생들 반이었으며 교실이 부족해서 이들은 2부제 수업을 했다고 한다. 김홍식은 북국민학교 시절을 회상하면서 다음과 같이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아마 자랑인지 몰라도 5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제주도 출신이었는데 진학상담을 하면서 어디를 지원하겠느냐고 물어봐서 내 성적이 탑에 드니까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 “거 뭐 붙게 되면 우리나라에서 젤 순위 가는 경기중학교쯤 볼 수 있지 않겠냐.”고 했어요. 난 어리니까 뭣도 모르니까 거기 지원하려고 하니까 선생님이 깜짝 놀라면서 경기중학교는 북국민학교에서 5년에 한 사람 들어가나 마나, 10년에 하나 들어가나 마나 하니까 도저히 안정성이 없다고 해서 그냥 광주서중을 지원하고 6학년에 올라가서는 일본사람이 담임을 해서 광주서중으로 지원했어요. 그 때는 특별한 것도 없고 알아서 좀 공부를 했어요."
김홍식은 북국민학교를 졸업하고 1944년에 광주서중에 입학했다. 김홍식이 중학교 입학할 당시는 태평양전쟁 말기여서 더욱더 입학시험 경쟁률이 높았다고 한다. 한 학급이 70명이니까 20등 안에 들어야 입학 추천서를 써 주었다. 김홍식 기억에 같은 반에서 광주서중에는 2~3 명이 지원해서 혼자 합격을 하고, 목포상업고등학교, 군산중학교, 제주농업학교 등에 지원했지만 합격자 수가 많지 않았다. 국민학교 졸업 후 상급학교 진학률은 10명 내외였다고 하며 그 당시 중학교 학제가 6년으로 요즘 고등학교 학력까지 인정되었다고 한다.
중학생의 위상
"그 때는 중학교만 다니면 사회에서 상당히 인정해줬어요. 왜냐면 중학생이 희소했거든. 일정 때 광주서중이 전라남도에서 젤 크고 전체 학생수가 750명이었지. 일정 때는 광주서중에 다닌다고 하면 어딜 가나 인정해 줬어요. 내가 학생수를 아느냐 하면 교련조회를 했는데 그 때 전체 학생들을 모아 놓고 인원을 보고할 때 학생 대표가 대대장 이하 750명이라 했던 것이 지금도 기억나요."
김홍식 광주서중 시절에 지방 학생은 무조건 기숙사 생활을 하다가 2학년이 되면 전원 퇴사했는데, 이는 방을 비워 주어야 신입생들이 들어와서 살 수 있었기 때문이라 한다. 기숙사 생활을 하면 단체생활에 필요한 여러 가지 생활규칙을 배울 수 있었다고 한다. 김홍식이 기억해 보면 기숙사 사감이 있었는데 한 달에 한번 집에서 생활비를 부쳐주었다. 사감 앞으로 50원이 들어오면 수업료 등 학생에게 필요한 학습비, 식비 등을 제하고 남은 돈을 알려주었다. 그 당시 50원이라면 공무원 월급이 40~50원 할 때니까 아주 많은 돈이어서 아무나 진학을 하지 못하기도 했다. 그래서 중학교로 진학하려면 부모의 재산세 납입 정도를 보아서 허락할 때였다고 한다.
광주서중 시절에 광복
"광복 때 기억이 나는데, 그 때 태평양전쟁 말엽이니까 공부도 했지만 전시체제에 도움을 줬어요. 광주비행장을 건설하는데 동원돼서 근로노동도 했어요. 8·15 광복날은 어디로 동원됐는가 하면 광주에 가면은 무등산이라고 있는데 그 때 여름철이어서 산머루 채집했어요. 산머루(산포도)를 가공해서 잠수함 연료로 쓴다는 거야. 학생 한 명당 몇 kg씩 따오라고 무등산에 풀어놨어요. 그 날도 머리위로 비행기가 지나가니까 ‘차라리 산에 온 김에 광주에 폭격이나 해버려라.’ 하면서 농담도 했어요. 그렇게 농담하던 찰나에 12시 되니까 경계경보 소리가 나는 거라. 우리는 할당량을 채워서 내려가려고 하는데 교감선생님(그 당시는 교두라 했으며, 일본인임)이 빨리 오라고 해서 가보니까 광장에 학생들이 모여 있는데 분위기가 이상했어요. 침통한 분위기였는데 한국 선생님이 한 분 계셨는데 선생들끼리 얘기하는데 ‘전쟁이 끝났는데 이거 필요 없지 않습니까?’ 하는 말을 들어서 어린 마음에 깜짝 놀랐어요. 광주 무등산 기슭 광장에 모여서 시내까지 오는데 한 4㎞ 쯤 될 거예요. 행진을 하는데 주변 분위기가 이상했어요. 학교로 돌아와서 강당에 모이니까 교장선생님이 일본이 패전했다는 얘긴 안 하고, 휴전됐으니까 여러분은 지시가 있을 때까지 고향에 가 있으라고 하니까 고향집에(제주시) 내려왔지."
김홍식이 광주 하숙집에 있는데 라디오에서 일본이 패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8월16일 기차를 타고 목포로 내려오는데 정말 그 감격은 이루 다 표현할 수 없었다고 한다. 목포에 오니까 폭격으로 전기도 다 끊기고 교통도 막혔지만 흥분의 도가니였다고 한다. 목포 부두에서 어렵게 개인 발동기를 구해서 제주도로 내려왔다.
"일정 때는 뭐, 페리오가 아니고 자그마한 배여서 한 10시간 이상 걸렸어요."
지금은 제주시 동부두에서 여객선을 타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서부두 쪽에서 여객선이 다녔지만 부두접안 시설이 잘 안 되어 있어서 배가 먼 바다에 뜨면 종선으로 이동하던 시절이라 한다. 김홍식이 제주시 집에서 8월달만 지내고 개학을 한다 해서 광주에 올라가서 해방된 조국에서 처음으로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해방된 조국의 대학생
김홍식은 1950년 5월에 서울대학교에 입학했다. 광복이 되니까 일제강점기와 달리 중학교를 졸업하면 대학 진학은 자유로웠다고 한다. 중학교 6학년이 되면 문과반과 이과반으로 나뉘었는데 김홍식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어에 관심이 있어서 문과반에 들었고 조선어를 전공하기 위해서 대학(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 입학할 때도 국어과를 선택했다고 한다. 김홍식이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6·25전쟁이 일어나서 전시 때 개교를 해서 부산에 피난 가서 가교사에서 공부를 했었다.
김홍식이 대학생 때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국어 교수가 있었는데 교수진은 일정 때 경성제국 졸업생 들이 대부분이었다. 1926년에 경성제국대학이 설립되었는데 1945년 해방 될 때까지 졸업생이 17 명밖에 안 되었다. 어떤 해엔 한 사람 밖에 입학을 안 하거나 한 명도 없기도 했다. 이 대학을 졸업해도 취직도 안 되고, 관계 당국의 감시를 받으니까 잘 가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대학 들어가는 게 뭐 학교 얘기가 나오면 길어지는데, 학제도 여러 번 바뀌었지만 대학이라고 하는 것이 한국에 하나 밖에 없었어요. 서울에 경성제국대학이 있었는데 대학에 바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들어가서 2년인가 3년인가를 마치고 본과로 올라가면 3년 과정을 다녔어요."
한국학생들은 위와 같은 학제를 밟을 수 없으면 일제 고등학교를 다녀야 했는데 지금 한국의 고등학교와는 아주 달랐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여서 한국인 전용 고등학교가 없었다. 고등교육을 더 받으려면 일본으로 가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에 들어와서 경성제국대학 본과에 들어가는 방법이 있었다고 한다. 일본에 명치대학 예과라든지 중앙대학 예과가 있어서 여기를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본과에 들어가기도 했다. 또한 그 당시 한국에는 지금의 전문학교 교육기관도 있었다. 예를 들면 ○○고등농업학교, ○○고등상업학교라 해서 여기를 졸업하면 경성제국대학 본과에 입학할 수 자격을 주었다고 한다.
교복에서 미군복으로
"일정 때에 중학교 다닐 때는 교복이 있었어요. 국방색 교복을 학교에서 배급을 줬어요. 학교마다 교복이 비슷했어요. 광복이 되어도 우리 나라에서 옷감을 만들 수 있는 공장도 없어서 일본 사람들이 내 버리고 간 군복들을 입었고, 일본군이 신던 구두를 신었어요. 그러다가 미군이 들어오니깐 미군 사제복을 탈색하고 염색해서 옷감으로 사용했어요."
김홍식이 기억해 보면 광목이나 미녕을 물들여서 양복점에서 양복을 맞춰 입었지만 대학생일 때도 우리 나라에는 양복감을 만들 만한 기술이 없었다고 한다. 김홍식은 주로 1950년대에 아버지가 청년시절에 입었던 옷을 물려 입었다고 한다. 서울에서 하숙할 때 하숙집 주인이 그 당시 국방부차관을 만나러 갈 때 그 양복을 빌려주기도 했다. 김홍식이 부친 양복을 입었으니까 하숙방에 걸어 두면 하숙집 주인이 마땅한 외출복이 없어서 이를 빌려 입었다고 한다. 하숙집 주인이 차관을 만나러 간 것은 특별한 용무라기보다는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군부대 동기여서 모두가 살기 어려울 때니까 일종의 사적인 청탁 방문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만든 천이 있었지만 질이 좀 나쁘고 배급제였으며, 마카오에서 밀수품이 들어왔지만 일반 사람들이 사 입기는 어려웠다. 1953~4년부터 남대문시장에 가면 미군들이 입던 헌 옷가지를 살 수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