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유태병 할아버지의 생업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T05025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납읍리
집필자 심재석

토질 좋은 납읍, 농사가 주업

농사는 조, 콩, 보리, 고구마를 재배했다. 납읍은 제주도 다른 지역에 비해서 토질이 좋아서 그나마 농사를 지어 먹고 살 수 있었다. 사람들이 먹는 일상식으로는 쌀밥은 구경하기도 힘들었다. 대부분 마을 사람들은 살림이 어려워서 “시집가는 처녀가 결혼 전까지 쌀 한말을 못 먹고 시집간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먹고 사는 것이 힘든 살림살이다.

납읍은 중산간 마을이지만 바다가 가까워 자리젓, 고등어 등이 밥상 위에 올라왔다. 마을에서 혼례 같은 잔치가 있으면 먹거리도 나아졌다. 누님이나 형님이 결혼할 때는 신부집에 돼지 한 마리, 닭 몇 마리, 계란 몇 줄하고 쌀 몇 말을 갖다 주었다. 잔치를 할 때에는 돼지, 닭을 잡고, 바다가 가까우니 해산물을 준비하고, 쌀은 귀해서 많이 준비할 수 없고, 밥은 주로 보리에 팥을 넣어 지은 밥을 준비했다. 보통 손님들 잔칫상에는 보리에 쌀 조금 넣고 팥을 넣어 만든 밥과 돼지고기 세 점, 막걸리 등이 올라갔다.

연자방아가 있었던 시절의 추억

도로가 많이 바뀌어 마을도 예전과 달라졌다. 납읍은 도로망이 아주 잘 갖춰져 있다. 어디든지 갈 수 있는 곳이 바로 납읍이다. 실제 마을 도로에 돌이 많아서 사정이 안 좋았는데, 새마을 사업을 하면서 정부에서 지원을 해줘서 지금과 같은 도로망이 갖춰지게 되었다.

마을 어귀에 연자방아가 있어야 곡물을 찧을 수 있었는데, 제주도는 물이 귀해서 연자방아가 많았다. 동네마다 약 30군데 정도 있었다. 1970년대 중반까지도 납읍에 연자방아가 있었다. 연자방아를 만들면 그 주변이 아이들이나 마을 노인들의 쉼터 역할을 했다. 아이들은 공기도 하고 제기차기도 했다. 연날리기도 많이 했다. 이런 모습은 약 35년 전에 없어졌다.

연자방아는 방아 주변에 사는 집들에서 공동 출자해서 관리하고 이용했다. 다른 곳에서 와서 사용하려면 관리 책임자에게 허락을 얻어야 했다. 이것은 정미소가 들어오면서 거의 다 없어졌다. 정미소가 처음 들어온 때는 해방 전이었다. 정미소는 석유를 사용해서 연자방아에 비해 수지가 좋지 않아 처음에는 주로 도정만 정미소에서 했다. 방앗간은 없었고 참기름 짜는 기름틀은 있었다. 유채의 착유는 따로 하지 않고 농협에서 전량 수매해 갔다. 유채 공장 같은 시설에서 착유를 했다.

마을의 효자 - 좁쌀로 몰래 만들어 판매한 '납주'

납읍리에서는 좁쌀을 많이 재배했다. 당시 술을 좁쌀로 담그는 경우가 많았다. 납읍에서도 직접 재배한 좁쌀을 원료로 술을 빚어 먹었다. 그 술의 이름은 납읍에서 만들어진 술이라고 해서 납주라 불렸다. 납읍 마을에서는 납주가 농사 이외의 소득원으로서 살림살이에 보탬이 된 효자 노릇을 했다.

이 술은 제주도의 소주고리인 '고소리'에서 불을 때서 증류해서 만든 술이다. 당시 납읍 마을 내에 있는 많은 집에서 고소리를 두고 돈벌이를 했다. 집에서 먹는 것 이외에 주변 마을에 몰래 내다 팔아서 돈을 벌었다. 납주 소비가 마을을 벗어나 주변 마을까지 판매가 이루어지자 세무서에서 가만있지 않았다.

1년에 두세 번 밀주 단속을 나왔고, 단속하던 집에서 술을 담는 고소리를 죄다 깨고, 고소리 숫자만큼 벌금도 추징하였다. 당시 마을에는 밀주 제조로 벌금을 낸 사람이 꽤 많았다. 그러나 당시 농사 이외에는 뚜렷한 수입원이 없어서 납주 판매는 몰래 계속되었다.

당시 양조장으로는 제주시에 알콜 공장이 있었고 한림 옹포에 막걸리 공장이 있었다. 납주 때문에 주변 공장에서 나오는 술이 납읍에서는 거의 판매가 되지 않자 술공장 사장들이 세무서에 신고를 했다고 한다.

납주가 유명세를 타자 마을 사람들이 물허벅에 납주를 넣어 등에 짊어지고 제주시에까지 내다 팔았다. 그러나 당시는 돈을 주고 술을 사먹기 어려운 살림살이였고 또한 납주를 제조한 것도 팔아서 먹고 살기 위한 방편이었다. 납주는 유교식 의례가 많은 납읍에서 제의용으로도 필요했고 실제 마을 행사에 쓰기 위해 만들어서 소비도 했다.

소를 키워 자식 공부시키다

납읍의 경제적 기반은 농사 이외에는 목축업이다. 납읍은 경지 면적이 넓지 않은 반면 목초지는 풍부해서 소와 말을 많이 키웠다. 마을에서는 농사를 지어서 사는 사람보다 축산을 한 사람이 경제적으로 나은 살림살이를 했다. 유태병은 결혼한 이후 별 재산이 없었다.

남의 소를 먹여서 키워 주면 나중에 새끼 소 반을 주는데, 유태병은 군 입대 전에 남의 소를 먹였던 적이 있어서, 돈을 보태어 그 소를 사 키웠다. 어차피 농사를 지으려면 소가 필요했다.

높은 곳에서 보면 소도 많고 밭도 많은데 막상 내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술도 안 먹고 부지런히 일했다. 비료도 없던 시절이라 부지런히 일하는 수밖에 없었다. 자식들이라도 열심히 공부시켜야겠다는 욕심이 있어서 넉넉하진 못하지만 자식들에게 잘해 주려고 노력했다. 학창시절 등록금 때문에 창피도 당한 아픈 기억이 있어서 자식들에게는 그런 창피를 당하게 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등록금 만큼은 차질없이 대 주었고 자식들도 잘 따라 주었다. 축산을 하지 않으면 학비나 토지 마련에 어려움이 있었다.

밀감나무 한 그루로 대학 공부 시킨다

박정희 대통령이 농촌을 살려야 한다고 해서 고구마와 유채를 심게 했다. 이것으로 알콜을 생산하고 농촌 소득을 올려줬고, 유채 기름으로 농촌 살림살이를 키워줬다. 그 다음에 맥주보리를 심어서 환금작물로 키워서 살림이 많이 나아졌다. 유병태가 마을 이장을 한 지 한 20년 되었는데, 맥주보리의 수입은 밀감 농사를 지어 벌어들이는 소득과 비슷할 정도로 괜찮았다. 밀감은 1980년대 초부터 잘 되었는데, 그때 마을 전체 소득이 괜찮았다. 밀감나무 한 그루면 대학 공부도 시킨다는 말이 있다. 실제 농가 수입이 괜찮았다고 한다.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