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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000502
한자 百濟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포천시
시대 고대/삼국 시대
집필자 김진호

[정의]

포천 지역을 다스렸던 한국의 고대 국가

[개설]

온조왕을 시조로 하여 기원전 18년 현재의 한강 하류의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건국하였다. 『삼국지(三國志)』에는 백제가 마한(馬韓)의 일부이었다고 한다. 1세기에서 3세기에 걸쳐 한반도 중부의 소국 및 한사군과 대립하며 성장하였으며, 4세기부터 충청도·전라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근초고왕 대는 전라도 지역 대부분을 장악하고 북쪽으로 진출하여 고구려와 대립한 끝에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5세기 초부터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아신왕이 직접 항복을 하기고 개로왕이 전사하는 등 수난을 당하였다. 그리고 475년에는 한강 유역을 상실하고 웅진으로 수도를 옮겼다.

이후 신라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와 맞섰으며, 성왕은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협공하여 한강 유역을 되찾았으나, 신라의 배신으로 한강 유역을 다시 상실하고 관산성에서 전사하였다. 660년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 공격을 받고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며 멸망하였다. 백제 문화는 대체로 세련되고 섬세한 것이 특징으로, 이러한 백제 문화는 왜 등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포천 지역은 청동기 시대 이후 한(漢)의 분열책으로 유력한 정치 집단이 없다가,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한 초기 국가 시대에 접어들어 마한의 영향에 속하게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3세기 무렵 동쪽으로 철원·춘천 지방의 예족, 북쪽으로 대방군과 대치하면서 남쪽 백제의 세력권에 들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강 유역을 바탕으로 건국한 백제가 점차 영역을 확대하여 3세기에 이르면, 백제의 고대 국가 발전과 함께 백제의 영향권에 속하게 되었다. 이어 진한 땅에서 흥기한 백제마한의 전 국토를 병합한 뒤 세력을 북방으로 뻗쳐 한의 세력을 축출하고 그 위에 군림하자 포천 지역은 백제의 세력 하에 들어갔다.

포천 지방은 백제와 대방군의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백제와 힘을 합하여 대방군 공격에 참여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과정에서 포천 지역은 백제와 밀접한 관련을 맺었을 테고, 낙랑군과 대방군이 한반도에서 축출되고 한이 소멸하는 313~314년 무렵 이전 어느 시기에 백제의 지배하에 들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고이왕 때부터 고대 중앙 집권 국가로 발돋움하였다. 비류왕 대에 낙랑·대방의 한 군현이 고구려에 의해 소멸되었고, 이때부터 백제의 북쪽 변경 지대라고 할 수 있는 연천·포천 지역은 소멸한 한 군현에 대신하여 고구려와 백제가 대치하는 접전 지역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 후 남진 정책을 계속하던 고구려가 475년(장수왕 63) 백제를 공략하고 한강 유역의 광범한 지역이 고구려 판도에 들어감에 따라 포천도 이에 속하면서 비로소 고유의 지명을 갖게 되었다. 즉 마홀군(馬忽郡)의 명칭이 붙여졌으며, 명지(命旨)라는 별호도 이때부터 생겼다. 최근 반월산성 유적을 발굴·조사하는 과정에서 마홀(馬忽)이라 새겨진 기왓장이 발견되어 이를 입증하여 준다.

[관련 유적]

포천 지역에는 백제 초기의 성을 개축한 포천 고모리 산성(抱川古毛里山城)·성동리 산성(城東里山城)·고소성(姑蘇城) 등 옛 성터가 있어 당시 이 지역의 군사적 중요성을 보여 준다. 포천 고모리 산성[경기도 기념물 제185호]은 포천시 소흘읍 고모리 고모산[380m]의 정상부에 위치하며, 토성과 석성으로 이루어진 산성으로 북으로는 철원·포천 일대와 남으로 한강 일대를 연결하는 군사상 요충지에 자리하고 있다.

포천 고모리 산성의 정확한 이름이나 내용에 대해서는 문헌에 전혀 보이지 않으나, 유적에서 백제 초기의 토기 조각이 다량 출토되고 있으며 북벽 안쪽의 건물 터 등지에서도 백제 초기의 토기 조각이 발견되고 있다는 점에서 당시에 대성(大城)으로 기능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성동리 산성포천군 영중면 성동리 산727번지에 위치한 전형적인 퇴뫼형 석축형 산성이다. 성동리 산성에 대해서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 여러 문헌에 기록이 있으며, 특히 『문화 유적 총람』에서는 궁예와의 관련 전승을 기록하고 있다. 성동리 산성이 삼국 시대 많이 사용된 규형 축성법(圭形築城法)을 이용하여 쌓은 산성이라는 점과 성내에 출토된 백제 초기의 토기 조각들로 보아 백제 초기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 외에도 고소성 등에서 백제 초기의 토기 및 기와 조각이 출토되고 있어 포천 지역이 고대 삼국 간의 상호 경쟁 과정에서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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