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05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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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土器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
집필자 | 김구군 |
[정의]
경상북도 청도 지역에서 출토된 선사 시대부터 통일 신라 때까지의 토기.
[개설]
청도 지역에서는 일찍이 신석기 시대부터 토기가 제작·사용되었다는 것을 오진리 바위 그늘[岩蔭] 유적의 조사를 통해 밝혀졌다. 이후 청동기 시대와 초기 철기 시대, 원삼국 시대, 삼국 시대, 통일 신라에 이르기까지 이 지역 주민들이 남긴 다종다양한 토기가 알려져 있다.
[신석기 시대]
청도 지역에서 빗살무늬 토기가 출토된 유적으로는 산동 지방의 운문면 오진리 암음 유적, 산서 지방의 풍각면 봉기리[송서리] 유적, 각남면 신당리 유적, 화양읍 진라리 유적이 있다.
먼저 오진리 암음 유적을 보면, 조기에 해당하는 Ⅳ층[최하층]에서 구순각목 무문양 토기[口脣刻目無文樣土器]와 원시성이 엿보이는 오진리식 토기(梧津里式土器), 전기·중기인 Ⅲ층은 무문양·자돌(刺突)·압인(押引)·침선문 토기(沈線文土器)와 융기문 토기(隆起文土器), 후기·말기인 Ⅱ층과 주거지에서는 이중 구연의 무문양 토기와 침선문 토기가 출토하여 신석기 시대 전 기간에 걸친 유물의 구성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신당리 Ⅱ구역 주거지 23호의 적석더미 속에서는 민무늬 토기 조각들과 함께 굵은 사격자태선문(斜格子太線文)이 시문된 중기 빗살무늬 토기 조각 1점이 포함되어 있었다. 봉기리 유적 삼국 시대 주거지 1호 주변에서도 가는 사격자세선문(斜格子細線文)이 시문된 것과 가는 삼각 집선문(三角集線文)이 시문된 후기의 빗살무늬 토기 조각이 각각 1점씩 나왔다. 그리고 진라리 유적 수혈 유구 21호에서는 신석기 시대 종말기에 해당하는 겹아가리 토기(二重口緣土器)가 2점 출토하였다.
[청동기 시대]
지금까지 청도 지역에서 민무늬 토기가 출토된 곳으로는 산동 지방에서 운문면 오진리·순지리 유적, 산서 지방에서 풍각면 송서리유적, 각남면 신당리·예리·화리 유적, 화양읍 진라리·서상리 유적, 청도읍 송읍리·유호리·내호리·사촌리 유적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예리 유적과 내호리 유적만 지표 조사를 통해 알려진 유적이고 나머지는 모두 부분적이나마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 동안 조사가 많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그 결과를 종합해 보면, 여느 지역 못지않게 청동기 시대 전 기간에 걸쳐 주민들이 정주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신당리 주거지 12호와 27호에서는 돋을 띠 새김무늬 토기(刻目突帶文土器)와 겹아가리 톱날 무늬 토기(二重口緣鋸齒文土器)·외반 구연 토기(外反口緣土器) 등이 출토하였다. 그리고 신당리·화리·송읍리·진라리 유적에서는 청동기 시대 전기에서 중기에 이르는 주거지들에서 골아가리 토기(口脣刻目文土器)와 구멍무늬 토기(孔列文土器)·겹아가리 빗금무늬 토기(二重口緣短斜線文土器)·붉은 간토기(赤色磨硏土器) 등이 나왔고, 무덤 유구로서 전기에 해당하는 신당리 토광묘와 중기 이후에 축조된 신당리·화리·진라리 고인돌 등에서는 가지무늬 토기와 붉은 간토기 단지가 확인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초기 철기 시대라고도 부르는 청동기 시대 후기의 토기를 내는 유적으로는 사촌리·서상리·신당리·오진리 유적을 들 수 있다. 이 가운데 사촌리 유적은 이 시기의 앞 단계에 해당하는 단면 원형의 점토 띠 토기(圓形粘土帶土器)만 내는 단일 시기 유적으로서 중요한 일점을 차지한다. 서상리와 신당리·오진리 유적에서는 단면 원형의 점토 띠 토기가 간혹 섞여 있지만 뒤 단계에 해당하는 단면 삼각형의 점토 띠 토기가 주로 출토되고 있다. 특히 신당리의 경우는 와질 토기(瓦質土器)도 같이 나오고 있으므로 원삼국 시대로 이행하는 마지막 단계의 행보를 잘 알려준다.
이처럼 청도 지역의 민무늬 토기는 청동기 시대의 전 단계에 걸쳐 자료가 집적되고 있어 이 지역 토기의 변천 과정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주변 지역과의 비교 연구도 가능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원삼국 시대]
기원전 1세기부터 영남 지방에서는 낙랑계 한식 토기의 영향으로 탄생한 와질 토기(瓦質土器)가 성행한다. 바탕흙으로 매우 고운 점토를 쓰고 회전판과 물레[轆轤]를 사용하여 만드는 데, 속심은 대체로 회색이며, 회흑색 내지는 흑색을 띤다. 와질 토기는 쇠뿔잡이 항아리[組合式牛角形把手附壺]·둥근 밑 항아리[圓低短頸壺]·주머니 옹[小形甕] 등의 고식 와질 토기와 굽다리 긴 목 항아리[臺附長頸壺]·화로 모양 토기[爐形土器] 등을 포함하는 신식 와질 토기로 구분된다.
청도 지역에서 와질 토기가 확인된 유적으로는 각남면 신당리 유적, 화양읍 범곡리 유적 등이 있다. 대다수가 조각에 불과하지만 그나마 기종을 알 수 있고 형태를 추정할 수 있기 때문에 청도의 역사와 이 시기를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자료이다.
[삼국 시대]
삼국 시대의 토기는 생산 유적인 가마터[窯址], 생활 유적인 집터[住居址], 산성(山城), 그리고 무덤 유적인 고분 떼 등에서 주로 출토된다. 청도 지역에서 삼국 시대 토기를 출토하는 유적은 곳곳에 산재해 있다. 물론 그 대부분이 고분 떼이지만 생산 유적과 생활 유적도 함께 확인되고 있기 때문에 상호 관계를 비교할 수 있게 되었다.
청도 지역에서 이 시대의 토기가 확인되고 있는 유적은 다음과 같다. 먼저 생산 유적으로는 5세기대의 각남면 옥산리 토기 요지가 있고, 생활 유적으로는 4∼5세기대의 풍각면 봉기리[송서리] 유적과 매전면 갈지리 유적이 최근에 조사되었다. 고분 떼로는 4∼6세기대의 화양읍 소라리 고분 떼를 위시하여 5∼6세기에 조영된 청도읍의 원정리·송읍리 고분 떼, 화양읍의 교촌리·동천리·범곡리·토평리 고분 떼, 이서면의 칠엽리·구라리·서원리·각계리·수야리·흥선리·고철리·양원리·신촌리 고분 떼, 각남면의 구곡리·옥산리·예리 고분 떼, 각북면의 우산리·삼평리·남산리·덕촌리·금천리 고분 떼, 풍각면의 송서리·성곡리·금곡리·안산리·덕양리 고분 떼, 운문면의 순지리·오진리·정상리 고분 떼, 금천면의 박곡리 고분 떼, 매전면의 구촌리·관하리 고분 떼 등이 있다.
청도 지역의 4세기대 토기들을 보면, 와질 토기로 회백색을 띠면서 돗자리무늬[繩蓆文]나 문살무늬[格子文]가 찍힌 타날 무늬 항아리[打捺文壺], 귀 달린 항아리[兩耳附壺]와 연질 토기(軟質土器)인 타날 무늬 장동옹[打捺文長胴甕], 손잡이 달린 옹[把手附甕], 시루[甑] 등이 있고, 그릇 표면에 자연유(自然釉)가 도포되어 반질반질한 고식 도질 토기(古式陶質土器)로 화로 모양 토기[爐形土器], 짧은 목 항아리[短頸壺], 귀 달린 항아리, 원통 모양 그릇 받침[筒形器臺], 굽다리 완[臺附盌], 바리 모양 토기[鉢形土器], 컵 모양 토기[컵形土器] 등이 출토되고 있다. 그리고 4세기 후반에는 바리 모양 그릇받침, 손잡이 달린 굽다리 완[把手附臺附盌], 긴 목 항아리[長頸壺], 무개식(無蓋式)의 굽다리 접시, 손잡이 달린 컵 모양 토기[把手附컵形土器], 큰 항아리[大壺]가 나타나기 시작하며, 뒤이어 뚜껑 있는 굽다리 접시[有蓋高杯]와 넓은 아가리 작은 단지[廣口小壺]도 출현하고 있다. 그 가운데 굽다리가 달린 그릇들의 투창을 보면, 모양은 마름모형·삼각형·장방형 등이 있는데 투창의 배치는 모든 굽다리 접시와 굽다리 완이 상하 일렬인 것과 달리 그릇 받침의 경우는 위아래를 엇갈리게 배치하는 특징을 보인다.
5세기에 접어들면, 대체로 앞 시기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지만 굽다리 접시에서 팔자 모양[八字形]의 굽다리와 위아래가 엇진 투창[上下交互透窓]이 나타나고 굽다리 목 항아리[臺附中頸壺]와 굽다리 긴 목 항아리[臺附長頸壺] 등이 새롭게 등장한다. 5세기 후반에는 뚜껑 받이 턱이 없는 무개식 굽다리 접시와 상하 일렬 투창(上下一列透窓) 요소는 자취를 감춘다. 그리고 이때까지 굽다리 접시의 뚜껑 손잡이에 보이던 단추 모양 꼭지를 대신하여 대각도치형(臺脚倒置形) 꼭지 손잡이가 새롭게 모습을 드러내는데, 일명 ‘창녕계(昌寧系)’ 꼭지라고 부르는 것이 대세를 이룬다. 이 밖에 굽다리 접시에서는 경주 양식의 이단각과 일단각이 채용되고, 손잡이 달린 잔[把手附杯], 쇠뿔 모양 손잡이 달린 소옹[牛角形把手附小甕], 굽다리 완, 연질 뚜껑 있는 작은 옹[軟質有蓋小甕], 들린 밑 항아리, 다리미 등이 추가된다. 그러다가 5세기 말이 되면 경주 양식의 형태적 특징을 모방한 토기들이 제작된다.
이후 6세기에는 재지적 요소와 결합되어 있던 창녕 양식이 해체되기 시작하면서 부가 구연 대부 장경호(附加口緣臺附長頸壺)와 개배(蓋杯), 납작 밑 단지[平底短頸小壺] 등이 출현하며, 손잡이 달린 잔에는 돌대가 사라진다. 그리고 6세기 중엽에 이르면 짧은 굽다리 접시[短脚高杯]가 나타나는데 접시의 뚜껑 드림 받이 턱이 V자 모양으로 변화한다.
[통일 신라]
6세기 후반부터 통일 신라에 이르는 토기는 갖가지 무늬 돋치개를 사용하여 찍은 무늬[印花文]로 특징된다. 문양의 종류로는 선 무늬[線文]·점원 무늬[點圓文]·점열 무늬[點列文]·동그라미 무늬[圓文]·꽃무늬[花形文]·동물 무늬[動物文] 등이 있다.
청도 지역에서 이 시대의 토기를 내는 대표적인 유적은 생활 유적으로 풍각면 봉기동 유적, 생산 유적으로 청도읍 송읍리 유적을 들 수 있고, 무덤 유적으로는 풍각면 성곡리 유적과 운문면 순지리 유적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골호(骨壺)가 출토된 청도읍 사촌리 유적이 있다. 봉기동의 고래 건물지에서는 타날 무늬 옹[打捺文甕]·굽 달린 완(盌)·굽 달린 병(甁)·시루[甑] 등이 나왔고, 송읍리의 기와 가마와 관련된 수혈과 폐기장에서는 굽다리 접시·굽 접시·항아리·큰 항아리·연질옹·손잡이 달린 동이·동이·굽달린 완·완·합(盒)·찍은 무늬 굽 달린 합·찍은 무늬 병 등이 출토하였다. 성곡리의 돌방 무덤[石室墓]에서는 인화문 토기로 보주형(寶珠形) 꼭지가 달린 합·굽 달린 완·납작 밑 병과 파수가 없는 잔[杯]·소옹(小甕)이 나왔고, 순지리 돌방 무덤에서는 인화 무늬 뚜껑 있는 굽다리 접시·뚜껑 있는 굽다리 접시·굽다리 완·납작 밑 단지·적색 연질 단지·끝이 말린 손잡이가 달린 연질 단지·인화 무늬 굽 달린 병·세 귀 달린 굽다리 합[三耳附臺附盒]이 출토하였다.
[의의와 성격]
현재 청도 지역에서 발굴 조사 등을 통해 확인된 토기의 자료는 신석기 시대부터 통일 신라에 이르기까지 모든 단계에 걸쳐 두루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지역 문화의 단계적인 변천 과정을 이해하고 정립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그리고 음식 문화와 관련한 용기로서 당시의 생활 문화를 복원하는 기초 자료일 뿐 아니라, 기술 발달의 척도가 된다. 또한 형식 분류를 통해서는 이들을 공유하는 지역 단위체를 도출할 수 있고, 지역 간 비교에 의해 문화의 전파나 교류 등 여러 측면들을 연구할 수 있어 매우 유용한 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