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300154
한자 冠春里
영어공식명칭 Gwanchun-ri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전라남도 해남군 황산면 관춘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소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설 시기/일시 1914년연표보기 - 전라남도 해남군 황산면 관춘리 개설
관춘리 - 전라남도 해남군 황산면 관춘리 지도보기
성격 법정리
면적 16.944㎢
가구수 234가구
인구[남/여] 437명[남자 215명|여자 222명]

[정의]

전라남도 해남군 황산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관춘리(冠春里)는 마을의 생김새가 갓을 쓴 모양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갓점골 또는 입점이라고도 불렀다. 1789년에 편찬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 관촌리(冠村里)라는 지명이 보이는데, 이로써 오래전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는 걸 알 수 있다.

[형성 및 변천]

본래 해남군 황원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신성리, 내외리, 평덕리를 병합하여 해남군 황산면 관춘리로 개설되었다. 현재 관춘마을, 산동마을, 신성마을, 평덕마을, 성만마을, 내산마을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관춘마을의 입향조는 천씨였다고 전하며, 이후 조선 중종 말엽에 남평문씨 문억붕(文億鵬)이 이주하였고, 같은 시기에 방씨(方氏)도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신성마을은 1840년경 제주고씨가 처음 들어왔다고도 하고, 300여 년 전 밀양박씨가 최초 입향하였다고도 한다. 산동마을은 행정구역 조정으로 신성마을에서 분리되었다. 평덕마을은 경주정씨 정자선이 고종 때 마을에 들어왔다고 전하는데, 『호구총수』에 이미 평덕이라는 마을이 나오고 있어서 마을 형성은 그보다 앞선 것으로 보인다. 성만마을은 1920년대 삼덕포원이 형성되면서 생긴 농토에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내산마을은 마을 사람들에 의하면 청주한씨 한권신이 1730년경에 최초 입향하였다고 전한다. 이후 김해김씨, 밀양박씨, 이천서씨 등이 차례로 들어와 마을을 이루었다.

[자연환경]

관춘마을은 평평한 너른 들판에 자리 잡고 있으며 마을의 서편에는 수십 그루의 팽나무가 방풍림의 역할을 하고 있다. 산동마을은 산으로 둘러싸여 분지형 촌락을 이루고 있다. 신성마을은 1970년대 초 월광포구가 간척되면서 바다와 갯벌이 거의 사라졌다.

[현황]

관춘리(冠春里)는 북쪽으로 금호호 건너 산이면 진산리, 동쪽으로 우항리, 남리리, 남쪽으로 옥동리, 서쪽으로 문내면 석교리와 접하고 있다. 2018년 10월 31일 현재 면적은 16.944㎢이고, 관춘리, 산동리, 신성리, 평덕리, 성만리, 내산리의 6개 행정리에 234가구, 437명[남자 215명, 여자 222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주업은 농업이며, 주 생산물은 쌀이다. 농업용수는 관춘제 물을 쓴다. 밭작물은 월동배추와 대파, 고추 등이 있다. 평덕마을은 본래 반농반어의 생활을 하였는데, 일제강점기에 평덕저수지가 축조되고 대규모 간척사업이 이루어지면서 주업이 농업으로 바뀌었다.

관춘리 780번지대흥사의 말사 도장사[성주사]가 있다. 신라 아도화상이 터를 잡고 성덕왕 때 지연이 세웠다고 하며, 450년 후 중건하였다고 한다. 1935년 금동불상이 발견되었으나 그 행방을 알 수 없다. 대웅전 안에 목조삼존불상, 여래상, 칠성탱화, 지장탱화, 후불탱화 등이 있었는데, 도둑이 든 후로 대흥사로 옮겼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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