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3006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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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善道 |
영어공식명칭 | Yoon Seondo |
이칭/별칭 | 약이(約而),고산(孤山),해옹(海翁),충헌(忠憲)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윤섭 |
출생 시기/일시 | 1587년 - 윤선도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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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13년 - 윤선도 진사시 장원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17년 - 윤선도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 |
활동 시기/일시 | 1629년 - 윤선도 별시문과 초시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29년 - 윤선도 봉림대군·인평대군의 사부가 됨 |
활동 시기/일시 | 1639년 - 윤선도 경상도 영덕으로 유배 |
활동 시기/일시 | 1643년 - 윤선도 산중신곡 19수 지음 |
활동 시기/일시 | 1652년 - 윤선도 어부사시사 40수 지음 |
활동 시기/일시 | 1653년 - 윤선도 예조참의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659년 - 윤선도 예송논쟁으로 인해 함경도 삼수로 유배 |
활동 시기/일시 | 1667년 - 윤선도 보길도에 은거 |
몰년 시기/일시 | 1671년 - 윤선도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675년 - 윤선도 이조판서 추증 |
추모 시기/일시 | 1679년 - 윤선도 충헌이라는 시호 내려짐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595년 - 윤선도 큰아버지 윤유기의 양자로 입양 |
출생지 | 한성부 동부 연화방 -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지동 |
거주|이주지 |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
거주|이주지 | 전라남도 완도군 보길면 |
유배|이배지 | 경원 - 함경북도 경원군 |
유배|이배지 | 기장 - 부산광역시 기장군 |
유배|이배지 | 영덕 - 경상북도 영덕군 |
유배|이배지 | 광양 - 전라남도 광양시 |
묘소|단소 | 전라남도 해남군 현산면 구시리 |
사당|배향지 | 해촌서원 -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해리2길 50[해리 90-2] |
사당|배향지 | 녹우당 -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녹우당길 135[연동리 82] |
성격 | 문신|문인 |
성별 | 남 |
본관 | 해남(海南) |
대표 관직 | 예조참의|동부승지 |
[정의]
조선 후기 해남 출신의 문신이자 시조작가.
[개설]
윤선도(尹善道)[1587~1671]는 해남윤씨(海南尹氏)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 여러 벼슬을 역임한 문신이자 국문학의 최고봉으로 평가받는 문인이다.
[가계]
윤선도의 본관은 해남(海南)이며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해옹(海翁),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아버지는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 윤유심(尹唯深)이고 어머니는 순흥안씨(順興安氏)이다. 8세 때 큰아버지인 윤유기(尹唯幾)의 양자로 들어갔다. 아들은 윤인미(尹仁美)이다.
[활동 사항]
윤선도는 1587년(선조 20) 6월 22일 서울 연화방(蓮花坊)[현 종로구 연지동]에서 태어났다. 1612년(광해군 4) 진사가 되었고, 1616년 성균관 유생으로 이이첨(李爾瞻) 등의 횡포를 규탄하는 「병진소(丙辰疏)」를 올렸다가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경상도 기장으로 유배지를 옮겼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이이첨 일파가 처형된 뒤 풀려났다. 의금부도사에 제수되었으나 3개월 만에 사직하고 해남으로 내려온 뒤 여러 벼슬이 내려졌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윤선도는 1628년(인조 6) 별시문과 초시에 장원으로 급제해 봉림대군(李爾瞻)·인평대군(麟坪大君)의 스승이 되었다. 1633년(인조 1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예조정랑·사헌부지평 등을 지냈으나 1634년(인조 12) 강석기(姜碩期)의 모함으로 성산현(星山縣監)으로 좌천된 뒤 1635년 파직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이듬해 식구들과 부리던 종 수백 명을 배에 태우고 강화도로 향했으나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보길도에 터를 잡고 은거하였다. 1638년 전란이 끝난 뒤 서울에 돌아와서도 임금을 알현하지 않았다는 죄로 경상도 영덕으로 유배되었다가 1639년 풀려나 보길도 부용동(芙容洞)에서 정자를 짓고 시(詩)·가(歌)·무(舞)를 즐기며 은둔생활을 하였다.
1652년(효종 3) 예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서인들의 반대 상소가 계속되자 사직하고 경기도 양주의 고산(孤山)에서 지냈다. 1657년 다시 벼슬길에 올라 동부승지에 이르렀으나 송시열(宋時烈) 등에 의해 관직에서 쫓겨났다. 1659년 효종이 사망하자 예론문제(禮論問題)로 서인과 맞서다가 함경도 삼수로 유배되었다. 1667년(현종 8) 유배에서 풀려난 뒤 보길도에서 지내다가 1671년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윤선도의 시문집으로는 1791년(정조 15) 왕의 명을 받아 전라감사 서유린(徐有隣)이 간행한 『고산유고(孤山遺稿)』가 있다. 1798년(정조 22) 전라감사 서정수(徐鼎修)가 윤선도 본가의 목판본을 참고하여 개편, 간행한 것이 오늘날 전하는 『고산유고(孤山遺稿)』이다.
『고산유고』는 6권 6책으로서 권1에 오언(五言)·칠언고시(七言古詩) 및 율(律)·절(絶)·집고(集古)·회문(回文), 권2에 소(疏), 권3의 상(上)에는 소(疏) 및 예설(禮說), 하(下)에는 서(書), 권4에는 서단(書單), 권5 상에는 서(書), 하에는 제문(祭文)·회문(回文)·축문·조약(條約)·서(序)·기(記)·설(說)·비명(碑銘)·잡저(雜著)·의(議)·잡록(雜錄), 권6 상별집(上別集)에 시(詩)·부(賦)·논(論)·책(策)·표전(表箋), 하별집(下別集)에 가사(歌辭), 부록에 시장(諡狀)이 적혀 있다. 특히 하별집(下別集)에 국문학적으로 귀중한 자료인 시조 및 단가 75수인 「산중신곡(山中新曲)」 18수, 「산중속신곡(山中續新曲)」 2수, 기타 6수,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40수, 「몽천요(夢天謠)」 5수, 「우후요(雨後謠)」 1수가 실려 있다. 현재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 82 고산 윤선도 유적지의 고산윤선도유물전시관에 소장되어 있다.
[묘소]
윤선도의 묘소는 해남군 현산면 구시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윤선도는 1675년(숙종 1) 2월 남인의 집권으로 신원(伸寃)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1678년 9월 충헌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1680년 8월 증직과 시호가 취소되었다가, 1689년 봄에 증직과 시호가 회복되었다. 해남 6현[최부·임억령·유희춘·윤구·윤선도·박백응] 가운데 한 명으로 해촌서원(海村書院)에 배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