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3006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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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信濟 |
영어공식명칭 | Kim Sinjae |
이칭/별칭 | 김아기(金阿其),김신재(金信才)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남도 해남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최성환 |
출생 시기/일시 | 1911년 02월 26일 - 김신제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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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32년 11월 - 김신제 전라남도 해남군 이진리 소작쟁의 지도 |
활동 시기/일시 | 1933년 - 김신제 비밀결사 전남운동협의회(全南運動協議會)에 가입해 활동 |
활동 시기/일시 | 1934년 2월 - 김신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투옥 |
몰년 시기/일시 | 1967년 04월 10일 - 김신제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83년 - 김신제 대통령 표창 수훈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김신제 건국훈장 애족장 수훈 |
출생지 | 전라남도 해남군 북평면 이진마을 - 전라남도 해남군 북평면 이진1길[이진리 356] |
거주|이주지 | 전라남도 해남군 북평면 이진마을 - 전라남도 해남군 북평면 이진1길[이진리 356] |
활동지 | 전라남도 해남군 - 전라남도 해남군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1묘역-202 -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산23-1]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전남운동협의회 회원 |
[정의]
일제강점기 해남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김신제(金信濟)[1911~1967]는 일제강점기 해남 지역의 항일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김아기(金阿其) 또는 김신재(金信才)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졌다.
[활동 사항]
김신제는 1911년 2월 26일 해남군 북평면 이진마을에서 태어났다. 1932년 11월 김홍배(金洪培)·오문현(吳文鉉)·박태술(朴太述) 등과 함께 이진마을 농민들의 소작쟁의를 지도하였고, 1933년 1월에는 김홍배·김암우(金巖于)와 함께 마을 고용인의 임금 결정 정례 집회에서 임금인상 투쟁을 주도하였다. 이후 1933년 5월 14일 전남운동협의회(全南運動協議會)가 결성되자 회원으로 가입해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전남운동협의회는 해남 지역 활동가 김홍배·오문현과 완도(莞島) 지역 활동가 황동윤(黃同允)이 중심이 되어 해남군 북평면 성도암(成道庵)에서 조직된 항일 비밀결사였다. 처음 설립할 당시 단체의 성격은 전남 지역의 농민·어민·노동자·인텔리를 포함한 사회주의운동의 통일적 지도 기관을 목적으로 하였다. 협의회 내에 사무부(事務部)·조직부(組織部)·조사부(調査部)·구원부(救援部)의 조직을 갖추었으며, 기관지로서 『농민투쟁(農民鬪爭)』을 발간하였다. 이후 1933년 8월 11일 제3차 전체 회의를 통해 운동 대상에서 노동자를 제외하고 농민층을 중심으로 활동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조직 형태도 농촌 각 마을별로 2~5명의 농민반·청년반·소년반을 결성하여 각 반을 면(面) 단위로 확대한 후 이를 각 군(郡)의 적색농민조합 지부로 삼는 아래로부터의 조직 구성을 시도하였다. 명칭도 적색농민조합 건설준비위원회(赤色農民組合建設準備委員會)로 개칭하였다. 이 시기 전남운동협의회는 완도·해남·강진·장흥·영암 등에 53개의 농민반과 26개의 야경단, 28개소의 야학(夜學)을 설치하여 조직 확대와 사회주의사상의 보급에 힘썼다. 또한 장흥·해남·완도 등에서 10여 차례의 소작쟁의, 어업조합(漁業組合) 폐지 운동, 강제 연금 인출투쟁 등을 지도하여 다섯 차례에 걸쳐 목적을 관철하였다.
김신제는 이러한 활동을 전개하는 도중에 조직이 노출되면서 동지들과 함께 1934년 2월 중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36년 12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김신제는 1967년 4월 10일 사망하였다.
[묘소]
김신제의 묘소는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산23-1]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1묘역-202에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김신제의 공적을 기려 1983년에 대통령표창,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