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0000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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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기도 포천시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 |
집필자 | 여성구 |
[태봉의 전략 요충지로서의 포천]
궁예(弓裔)가 세운 태봉(泰封)의 수도는 강원도 철원이었다. 따라서 궁예와 포천 지역은 일견 아무 관련도 없는 듯하다. 궁예와 관련한 설화는 주로 철원 지역에서 많이 전해 오며, 그 외에 연천·안성 등지에서도 전한다. 하지만 포천 지역 또한 철원과 인접한 곳으로, 지금까지도 유적·유물이나 산·고개·바위 등 지명 등에 태봉[궁예]과 관련한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포천시는 행정 구역 개편을 통해 편입된 지역이 많은데, 관인면은 갑오경장 이후 철원과 연천에 속해 있다가 1983년 당시 포천군에 편입된 지역이다. 이렇듯 현재의 행정 구역만을 놓고 역사를 재단해 이해하는 것은 잘못된 역사 인식을 갖게 할 수 있다.
궁예와 관련한 포천 지역 설화에는 일정한 역사적 진실이 반영되어 있다고 여러 연구자는 말한다. 또한 그러한 설화들은 대략 성장기의 안성, 전성기의 철원, 몰락기의 포천으로 구분된 특징을 보인다는 일치된 견해를 갖고 있다. 포천 지역이 태봉의 전략 요충지라는 사실을 많은 연구자가 인정하는 것이다. 반월 산성과 남창동의 유래는 그러한 사실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반월 산성은 학자들 사이에서 지금도 논란이 되는 곳으로, 특히 축성 시기에 대한 이론이 많다. 반월 산성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 성과로는, 백제 초기의 성터로 보는 경우가 우세하다. 한편, 궁예가 양길(梁吉)과의 전쟁 기간 내내 거의 최전선의 역할을 한 곳으로 궁예 정권 초기 축성되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와 달리 궁예가 철원에 도읍을 정한 뒤 이 산성을 쌓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궁예가 태봉을 건립하고 철원에 도읍을 정하여 남으로 신라, 서남으로 견훤(甄萱)의 후백제와 대치하여 자웅을 겨룰 때 그 부장(副將)이 축성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들을 종합해 보면, 반월 산성은 처음 백제가 축성하였으나 이후 궁예의 태봉에 의해 증축 혹은 보완되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반월 산성과 궁예와의 관련설은 뒤에 살펴볼 구읍리 미륵 불상을 통해 볼 때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관인면 초과 2리 남창동에는 궁예 왕이 군량미를 저장하기 위하여 큰 창고[남창]를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하며, 실제로 남창뿐 아니라 북창(北倉), 사창(司倉)도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로 보아 궁예 정권이 패서도와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로서 반월 산성과 함께 군창을 조성하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궁예의 마지막 자취를 증거 하는 이야기들]
궁예가 송악에 도읍을 정하던 시기부터 왕건(王建)에게 쫓겨 패주하기까지 주요 활동지는 철원·포천·연천을 중심으로 한 경기도 일대였다. 따라서 지금도 포천 일대에는 궁예와 관련한 지명과 유적지가 많이 남아 있다.
포천 지역에는 특히 궁예의 패망과 관련해 슬픈 사연을 간직한 곳이 많다. 일동면 강씨봉은 궁예의 부인 강씨가 날로 과격해지는 궁예의 폭정을 직간하다 오히려 유배를 당한 곳이다. 강씨는 강씨봉으로 유배된 후 곧 사망하였는데, 왕건에게 패한 궁예가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강씨를 찾았을 때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라 한을 품고 돌아서 올라선 곳이 이동면 국망봉이라고 한다.
주목할 것은 궁예가 마지막까지 왕건에게 저항하였던 곳이 포천 지역이라는 사실이다. 이야기를 통해 그의 자취를 추적해 보면 관인면 보개 산성→영중면 성동리 산성→영중면 파주골→영북면 명성산→이동면 도마치→강원도 평강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관인면 중리 보개산에는 궁예가 철원에서 왕건에게 쫓겨 와 쌓은 성터라고 이야기되는 보개 산성 터가 남아 있다. 또는 궁예의 큰 건물이 있던 곳이라 하여 대각 대성 터라고도 한다. 영중면 성동리의 성동리 산성[태봉 산성 터] 또한 궁예가 축성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918년(태조 1) 왕건의 군대에 쫓기던 궁예가 하루 저녁 숙영하기 위하여 백성과 군사를 동원하여 북강(北江)[현 한탄강]에서 이 성까지 일렬로 서서 손에서 손으로 돌을 전달해서 쌓았다고 전한다. 보개 산성과 성동리 산성 전투의 선후는 알 수 없으나 이곳 싸움에서 패한 궁예는 파주골을 지나 명성산으로 이동하였다.
[명성산에 얽힌 궁예 전설]
억새꽃 축제로 유명한 명성산은 포천 여느 지역에 비해 궁예와 관련한 이야기가 매우 풍부한 곳이다. 궁예가 왕건의 군대에 패하여 도망하였다고 하여 패주동(敗走洞)[가는골]이라 하던 것이 그 음이 변하여 지금은 파주골[坡州洞]이 되었다. 다시 궁예는 명성산에 은거하여 성을 쌓고 재기의 기회를 노렸다. 그러나 왕건의 군대가 명성산 뒤쪽을 포위하자, 군사들 대부분이 명성산 앞 절벽에 떨어져 죽고 궁예는 북쪽으로 간신히 도망하여 부양(斧壤)[지금의 평강]에 이르렀다. 이때 도망하지 못한 궁예의 군사와 그 일족이 온 산이 떠나가도록 울었다 하여 ‘울음산’, 곧 명성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영북면과 철원군 갈말읍에 걸쳐 있는 명성산에는 망봉(望峰)[혹은 망무봉(望武峰)], 궁예왕굴, 항서받골(降書받골) 등의 지명과 관련한 이야기가 전한다. 망봉은 궁예가 지금의 산정 호수 좌우로 적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망원대(望遠臺)를 올리고 봉화를 올렸다는 곳이다. 명성산 상봉에 위치한 궁예왕굴은 궁예가 왕건의 군사에게 쫓겨 은신하던 곳으로서 200명이 들어갈 수 있는 자연 동굴이다. 항서받골은 궁예가 왕건에게 쫓기다가 항복을 하였다는 곳인데, 원래는 궁예가 왕건 부자로부터 투항의 서한을 받았던 곳으로서, 이후 와전된 것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
화현면 현등산의 홍폭(虹瀑)에도 왕건에게 쫓겨 온 궁예가 피투성이가 된 몸을 씻고 성을 쌓아 저항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하지만 명성산을 빠져 나온 궁예는 이후 철원 경계로 들어가 부양 쪽으로 간 것으로 보인다. 궁예가 철원 북방으로 패주할 때 한밤중에 왕건 군사의 급습을 받아 싸웠다는 곳이 ‘야전골(野戰골)’이다. 또 이동면 장암 3리의 여우 고개는 왕건 군사들이 명성산에 주둔한 궁예 군사를 여우처럼 엿보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이동면 도평 3리의 도마치(道馬峙)는 궁예가 왕건과의 명성산 전투에서 패하여 도망할 때 이곳을 경유하게 되었는데, 산길이 너무 험난하여 이곳에서 말을 내려 끌면서 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등의 이야기가 내려온다.
[궁예의 미륵 신앙이 포천 지역에 남긴 영향]
포천 지역에는 미륵 신앙과 관련한 전설도 상당수 전하는데, 이는 궁예의 미륵 신앙과 무관하지 않다. 신라 왕실의 후예로서 정치적 갈등으로 도태된 궁예는 반신라적 성향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미륵 불국토의 새 세상을 염원하여 미륵불을 자칭하며 미륵보살처럼 금관을 쓰고 가사를 입었다.
반월 산성에 인접한 군내면 구읍리에는 두 구의 미륵 불상이 있다. 하나는 구읍리 석불 입상[포천시 향토 유적 제5호]으로 현재 포천 향교 뒤쪽 언덕에 있다. 2m 크기의 이 석불은 궁예가 철원에 도읍을 정하고 반월 산성을 쌓을 무렵에 조성된 것으로 얼굴이 거의 마모되었지만 마을에서는 미륵불이라 부르고 있다. 또 다른 하나는 구읍리 미륵 불상[포천시 향토 유적 제6호]으로 현재 용화사 법당 내에 봉안되어 있다. 이 미륵 불상에는 ‘신라 시대 어느 날 밤 갑자기 미륵불 남녀 한 쌍이 옥계천을 중심으로 솟아났다’는 전설이 전한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여자 미륵불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여자 미륵과 남자 미륵 두 구를 제작한 사례는 경기도 안성의 기솔리에도 있는데, 이 지역에서는 이들 미륵을 궁예 미륵이라 하여 궁예가 세웠다고 한다. 궁예 미륵은 궁예가 양길과 대결한 안성 비뇌성 전투에서 승리한 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구읍리 미륵 불상은 군내면 하성북리 백석동(白石洞) 지명과 관련이 있다. 이 마을 뒤에 있는 백석을 깎아 구읍리에 있는 미륵 불상 머리에 씌웠는데, 백석 마을 사람들이 자기 마을 흰 돌을 허락도 없이 가져갔다고 시비를 걸면서 그 흰 돌을 제 위치에 다시 가져다 놓았다. 그런데 얼마 후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는데 흰 돌이 다시 미륵불 머리에 씌워져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마을을 흰돌, 곧 백석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이 밖에 이동면 연곡 4리 뒷둔지[後屯地]에는 벌판 가운데 수목이 우거진 숲 땅속에 미륵이 묻혀 있다는 전설이 있다. 한때 젊은 사람들이 이 미륵을 파서 세우려고 하자 마을 노인들이 이것을 파서 세우면 마을 아낙네들이 바람이 난다고 만류하여 발굴 작업이 중단되었다고 전한다. 미륵 불상이 땅속에서 솟아오른다는 것은 곧 세상에 미륵불이 출현하였음을 의미한다. 새로운 세상을 바라는 마음에서 미륵 불상을 만들어 땅속에 묻어 두었던 것은 아닐까. 이처럼 포천 지역에 미륵불과 관련한 전설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것은, 궁예의 근거지였던 철원과 인접해 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포천 지역에서 전해 오는 궁예 이야기의 의미]
포천 지역은 궁예가 양길과 대립하던 초기 궁예에게 복속되었고, 후고구려 건국 이후에도 궁예의 중요한 세력 기반이 되었던 지역이지만, 포천 지역에서 전하는 궁예 전설은 그의 몰락기에 해당하는 시기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궁예의 최후는 『삼국사기(三國史記)』 궁예 전에 보인다. 기록에 따르면, 궁예는 918년 왕건 일파가 일으킨 정변으로 쫓겨나 사복 차림으로 도망해서 숲 속으로 들어갔다가 얼마 되지 않아 부양 주민에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포천 지역, 특히 명성산 일대에 얽힌 궁예 관련 전설은 궁예가 도망하였다는 숲이 명성산이 아닌가 추측하게 할 정도이다. 궁예 세력의 최후 항전지는 이곳 명성산 일대가 아니었을까.
이곳의 지명에 얽힌 전설은 왕건을 적대시하고 오히려 궁예를 옹호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물론 궁예에 비판적인 전설이 없는 것도 아닌데, 관인면의 지명 유래가 그것에 해당한다. 궁예의 학정을 못마땅하게 여긴 관리들이 관직을 버리고 성 밖인 이 지역에 모여 살았다고 하여 ‘관인면’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전설과 민담을 살펴볼 때 포천 지역은 궁예와의 친연성이 깊었던 곳으로 짐작된다.
사실 관계를 떠나 궁예와 이 지역을 연결시키려고 하는 지역 정서도 찾아볼 수 있다. 성동리 산성은 태봉 산성(胎峰山城)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조선 순조가 세자의 태(胎)를 안치한 곳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 듯 보이지만, 포천 지역민들은 ‘태봉성(泰封城)’이라고 불렀다. 또한 ‘한여울’, ‘큰 여울’이라는 뜻의 한탄강(漢灘江)을 전쟁에 패한 궁예가 나라 잃은 설움과 부하의 배신을 한탄하며 건넜다고 한탄강(恨嘆江)이라고도 하였다. 이렇듯 포천은 왕건과 궁예가 치열하게 공방전을 전개하였던 지역이다. 따라서 고려의 건국과 역사적 개연성을 부인할 수 없을 만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궁예의 몰락 이후 포천 지역은 호족의 지배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포천 지역 호족으로 이름난 이는 923년(태조 6) 태조 왕건에게 귀부한 명지성 장군 성달(城達)이다. 명지는 포천의 별칭이었다. 성달은 그 아우 이달(伊達), 단림(端林) 등과 함께 포천 지역을 관장하고 있었다. 성달이 고려에 귀순하기 한 해 전인 922년(태조 5) 명주[강원도 강릉] 호족 김순식(金順式)이 고려에 귀순하였다. 친 궁예 세력이던 김순식은 명주를 중심으로 상당히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왕건이 오랫동안 자기 사람으로 만들려고 노력하였던 인물이다. 김순식의 귀순 후 바로 성달이 귀순한 것으로 볼 때, 두 사람의 정치적 성향이 비슷하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포천 지역에서 궁예와 관련해 전해 오는 이야기를 들여다보노라면, 마땅히 제거되어야 할 궁예보다는 슬픈 궁예를 강조하며 그를 측은해 하는 측면이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궁예의 최후 항쟁지로서 포천 지역이 부각되는 것은 고려 건국 후 이 지역에 대한 중앙정부의 대응과도 맞닿아 있어 생각할 거리를 준다. 지역민의 반고려적 성향으로 인해 포천 지역은 고려 정부의 큰 관심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한 고려 정부의 무관심은 새로운 사회를 염원하는 미륵 신앙이 성행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고, 조선 숙종 때 여환(呂還)의 혁명에 포천 지역민이 참여하게 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