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0000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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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住生活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기도 포천시 |
집필자 | 신대광 |
[정의]
경기도 포천지역의 주택과 집터에서의 삶.
[개설]
인간이 기본적인 삶을 영위해 가기 위해서는 그 본거지로서 가옥을 필요로 한다. 가옥은 인간 거주의 최소 단위이고, 물질문화의 기본 속성 중의 하나이다. 인간은 가옥을 근거로 하여 생활을 해 왔으며, 그 형태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였다. 한편 가옥의 구조나 형태는 각 지역의 지리적, 사회적 환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래서 가옥은 해당 지역의 풍토적 성격이나 지역상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포천의 주거 유적]
포천은 선사 시대부터 인간이 거주한 지역이다. 청동기 시대에 고인돌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규모가 큰 부족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며, 삼국 시대에 이르러 대규모 마을 유적이 발견되었다.
1. 영송리 선사 유적지[포천시 영중면 영송리 158-2]
포천 영송리 선사 유적은 청동기 시대 후기에서 원삼국 시대, 조선 시대에 이르는 유적이 발견된 곳으로, 포천 지역의 선사 시대 유적으로는 최초로 조사된 곳이다. 집터가 발견된 영평천은 포천천과 합류를 한 후 영송리를 남쪽으로 휘어져 흐르고 있는 곳으로, 유적이 위치한 곳은 물의 흐름 안쪽에 해당된다. 포천에 거주한 고대인들은 하천을 끼고 살았음을 알 수 있다.
2. 금현리 고인돌[포천시 가산면 금현리 304-10], 자작동 고인돌[포천시 자작동 251-4], 수입리 고인돌[포천시 일동면 수입리 9-4]
고인돌은 당시 삶의 과정에서 포천 지역에서도 사람들이 부족을 이루며 살았음을 보여 준다. 돌기둥[支石]을 세워 그 위에 넓고 큰 돌을 얹어 놓은 것으로 몇 사람의 힘으로는 운반하고 만들기가 어려울 것이다. 이는 포천 지역 여러 곳에 규모가 큰 부족들이 거주하고 살았음을 보여 준다. 포천의 고인돌은 탁자형의 전형적인 북방식으로 낮은 구릉의 정상부와 평지에 조성하였다. 부족은 고인돌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 자작리 유적지[포천시 자작동 251-2]
자작리 유적은 한성 백제 시대의 지방 거점 마을 유적으로 발굴 결과 여러 집터가 발견되었다. 특별히 2호 집터는 길이가 23.6m에 이르는 대형 수혈 집터와 부뚜막 등 당시 구조를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며, 출토 유물로 보아 일반 마을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는 독자적인 지배 영역으로 추정된다. 이는 이 시대에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한 지배 세력과 마을이 형성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포천의 가옥 구조]
우리나라의 가옥을 구조 형태로 분류하면 관서형, 관북형, 중부형, 남부형 등으로 구분한다. 왜냐하면 방의 수나 배치가 주요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가옥의 외부 형태는 시간의 흐름, 건축 재료의 개량, 건축 기술의 발전에 따라 크게 변하지만, 가옥의 평면 구조는 좀처럼 변하지 않고 지역 주민들의 생활 양식을 반영하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의 전통 가옥은 주로 기와집과 초가집으로 구분한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상류층의 가옥은 미관상 깨끗하고 견고한 와가(瓦家)로 이루어져 있으며, 일반 서민들은 농가에서 생산되는 볏짚과 밀짚을 이용한 초가(草家)가 주를 이루었다.
포천에 나타나는 가옥 구조는 전형적인 중부 지방형으로 ‘ㄱ’ 자 형이나 ‘ㄷ’ 자 형이 주를 이루고 있다. 지붕의 형태도 주로 우진각의 형태가 우세하며, 부유층 가옥에서는 합각지붕의 형태가 나타나고 있다. 전통적인 서민 가옥은 ‘ㄱ’ 자 형을 보이고 있으며, 지붕 형태는 주로 우진각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1. 양반 가옥
황보근 가옥[포천시 신북면 금동 1리]은 전형적인 중부형의 부유층 가옥의 형태를 보여 준다. 이 가옥은 전형적인 ‘ㄱ’자 가옥에다 ‘ㄴ’ 자 형으로 부속 건물을 배치시켜 ‘ㅁ’자 같은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지붕 역시 부유층 가옥에서 볼 수 있는 합각지붕의 형태를 띠고 있다. 한편 전통적인 서민 가옥은 ‘ㄱ’자 형을 보이고 있으며, 지붕 형태는 주로 우진각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안동 김씨 고가[경기 문화재 자료 제138호, 포천군 창수면 오가리 557번지]는 영평천 변을 끼고 조성된 전형적인 중부 지방의 조선 시대 양반 가옥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이 고가는 금수정 진입로 부근에 위치하고 있는데, 마을 사람들에 의하면 99칸이나 되는 건물들이 있었다고 한다. 6·25 전쟁 당시 38선에 인접하여 인민군 사무소로 사용되다가 국군의 북진 때 소실되었다. 이 터가 발견된 당시에는 안채, 사랑채, 대문 자리가 남아 있었으며, 장대석 및 초석, 계단석 등이 산재해 있었다. 확인이 가능한 사랑채는 사각형 초석을 놓아 기둥을 올렸으며, 계단석이 남아 있다. 대문 터는 남아 있는 초석으로 보아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리고 전하는 바에 의하면 대문은 솟을대문이었다고 한다.
최근 상당 부분 복원되었으며 가옥의 구조는 안채, 사랑채, 문간채와 부속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경기 북부 지역의 전통 양반 가옥으로 보존 가치가 매우 높다.
2. 서민 가옥
서민 가옥은 일반적으로 안채와 문간채로 이루어진다. 중부 지방의 안채는 ‘ㄱ’자 집이 많은데, 이 유형은 부엌과 안방, 윗방이 ‘ㅡ’자로 놓이고 윗방 전면에 대청과 건넌방이 있는 형식이다. 문간채는 농촌의 민가에서 보이는 수장용 공간으로, 다른 지역에서도 일반적으로 나타난다. ‘ㄱ’자 형의 서민 가옥은 안방·건넌방·부엌 등으로 구성되었는데, 안방과 건넌방 사이의 공간은 흙바닥이었다. ‘ㅡ’자 형은 안방·건넌방·부엌 등이 나란히 놓여 있고, 문이 각 방의 앞쪽에 달려 있었다. 내부는 흙벽 그대로 쓰거나 헌 종이를 발랐고, 방바닥에는 대자리를 깔았다. 포천 지역의 서민 가옥도 일반적인 중부 지방의 가옥 형태를 보였지만 현재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현황]
1961년 통계에 의하면 포천의 인구는 115,759명이었으며, 농가 수는 10,914가구, 비농가 수는 12,611가구, 주택 수는 19,741채, 전체 인구에서 농업 인구가 차지하는 비율은 65.3%였다. 이것은 전통 시대에서 1960년대에 이르는 시기까지 농업이 주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는 가옥의 구조에 영향을 미쳐 상당 부분 전통 농가의 모습을 보여 주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1970년대 들어와 새마을 운동과 경제 발전에 따른 취락 구조의 개선 사업이 강력하게 추진되면서 도시형의 가옥이 건축되어 종래의 초가집은 거의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최근 포천의 주거 통계를 살펴보면 가구 수의 증가가 꾸준하게 나타나고 있다. 특히 주택의 형태 중에서 다가구 주택과 아파트가 크게 늘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포천 지역의 주거 형태가 도시형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 주며, 인구의 증가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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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의와 평가]
포천 지역은 최근 교통의 발전과 산업 시설의 증가로 급속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이는 주거 형태에도 영향을 주어 아파트와 다세대 주택 등이 늘어나고 있다. 이것은 포천의 자연 마을이 해체되어 가고 있으며, 주거의 형태도 전통 민가가 사라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전통적인 상업 지역과 그 주변도 크게 변하고 있다.
이러한 급속한 변화는 포천의 역사와 전통도 함께 사라지게 할 수 있다. 포천의 아름다운 전통을 살리고, 현대의 실용성을 함께 추구해 가는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