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0006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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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答抱川儒生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문서 |
지역 | 경기도 포천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정흥모 |
작성 시기/일시 | 1895년 - 「답 포천 유생」 최익현 작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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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고문서 |
관련 인물 | 최익현 |
용도 | 편지 |
[정의]
1885년 포천 출신의 유학자 최익현(崔益鉉)이 포천의 유생들에게 쓴 편지.
[개설]
「답 포천 유생(答抱川儒生)」[포천 유생에게 답함]은 포천 출신 면암(勉庵) 최익현[1833~1906]이 1885년(고종 22)에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을 고취시키려는 목적으로 포천의 유생들에게 보낸 서신이다.
[구성/내용]
「답 포천 유생」은 최익현의 문집 『면암집(勉庵集)』 권9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난번 회답은 갑자기 쓰느라고 생각한 바를 다 말하지 못하였기에, 뒤에 생각하니 매우 경솔하고 지나쳤으므로 송구하니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대개 의리를 원수처럼 여기고 의관을 찢어 버리고도 잘한 체 뽐내며 스스로 옳다고 합니다. 감히 누구라고 못하지만 바로 성문(聖門)을 배반한 무리이며 선왕의 죄인이니, 대의(大義)에 관계되는 바로서 천명(天命)이 두렵습니다. 그리고 야사(野史)를 쓰는 사람이 ‘어느 해 어느 날 포천 고을에서 유독 양복을 입고 공자의 사당에서 제사를 드렸다.’고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보고 앞으로 백세의 공론이 있을 것이니, 동해의 바닷물을 쏟아부어도 어떻게 그 누를 씻을 수 있겠습니까.
일전에 발송한 문서에서 미처 이 뜻을 언급하지 않고 다만 말로만 하는 이야기로 간략하게 나의 소견을 개진(開陳)한 것은, 진실로 일의 기틀은 아직 반드시 이렇지 않는데 헛된 명예로 실제 화란을 초래할까 염려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여러분께서 모의하지 않고도 한마음으로 도의를 지키는 신념이 확연하여, 가리키며 돌아보고, 서로 전하고 옮기는 사이에 까맣게 죽었던 국면이 완연히 회생할 것 같은 소식이 있게 되었습니다.
아, 이것은 참으로 죽지 않는 인심이며 항상 존재하는 천리입니다. 비록 병들어 누워서 무리하기는 어려운 몸이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운이 산처럼 솟아오릅니다. 앞으로 여러분의 책임은 매우 중대하니 스스로 조금 물러서고 싶어도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마땅히 굳게 발꿈치를 땅에 정착하여 조금도 동요하지 말기를 천만 바랍니다[昨覆卛爾當之 未盡所懷 從後思量 鹵莽甚矣 悚仄何言 盖讎視義理 毁裂衣冠 而揚揚自是 謂莫敢誰何者 卽是聖門之反卒 先王之罪人 則大義所關 天命可畏 且夫野史氏書之曰 某年某日 抱川一邑 獨以西洋之服 享夫子之廟云爾 則十目所視 百世在前 雖傾東海之波 何足以洗其累乎 日前發文 未及此意 而只以口頭說話 略貢愚見者 誠慮事機之未必如是 而虛各實之爲可慮也 何幸僉執事不謀同情 秉執確然 指顧轉移之間 黑死一局 宛然有回生底消息 嗚呼 此眞不死之人心 而常存之天理也 雖在病伏難強之中 自不覺氣湧如山耳 自此以往 僉執事責任甚重 雖欲自小退托不可得 望須牢着脚跟 少勿撓沮 千萬千萬].”
[의의와 평가]
최익현은 포천 출신의 유학자(儒學者)로 위정척사 운동을 펼쳤다. 이와 짝하여「답 포천 유생」은 최익현이 자신의 고향인 포천 유생들에게 편지를 보내서 위정척사 사상을 고취시키려고 하는 편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