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0006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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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代永平儒生請玉屛書院賜額疏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문서 |
지역 | 경기도 포천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흥모 |
[정의]
1682년 김창협(金昌協)이 포천 지역에 있는 옥병 서원(玉屛書院)의 사액(賜額)을 청하는 상소문.
[개설]
「대 영평 유생 청 옥병 서원 사액소(代永平儒生請玉屛書院賜額疏)」는 포천에 연고가 있던 농암(農巖) 김창협[1651~1708]이 영평(永平)의 유생들을 대신하여 옥병 서원의 사액을 요청하며 숙종에게 올린 글이다. 김수항(金壽恒)[1629~1689]과 그의 형 김수증(金壽增)[1624~1701], 김창협을 비롯한 김수항의 여섯 아들이 모두 영평에 은거하거나 빈번히 왕래하는 등 포천에 연고가 많았기 때문에 김창협이 사액을 청한 것이다.
옥병 서원은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주원리에 있던 서원으로, 1649년(인조 27)에 지방 사류(士類)들이 선조 때의 문신 박순(朴淳)[1523~1589]을 향사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1682년 김창협의 옥병 서원 사액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요청 당시인 1682년은 이미 2년 전인 1680년(숙종 6)에 기사환국(己巳換局)을 통해 남인(南人)들이 조정의 정권을 잡고 있을 시기였기 때문에 서인(西人)의 영수(領袖)였던 박순을 제향하고 있는 옥병 서원의 사액 요청은 받아들여지기 힘들었을 것이다. 결국 1713년(숙종 39)에 가서야 ‘옥병(玉屛)’이라는 사액이 내려졌다.
[구성/내용]
「대 영평 유생 청 옥병 서원 사액소」는 김창협의 문집 『농암집(農巖集)』 권7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가 아룁니다. 유현을 서원에서 제사 지내는 것은 본디 사류가 존경하고 사모한 나머지 그리하는 것이지만, 한 나라의 임금은 더욱 마음을 써서 그러한 일을 장려하여 성취시키고 유현의 도덕 수준에 비추어 은전을 베풀고 표창하여야 하니, 이는 바로 현자를 높이고 덕을 숭상하여 사림을 격려하고 유도(儒道)를 부흥시키는 근원입니다.
…… 이곳 영평은 실로 도성과 가까운 경기(京畿)에 속한 고을이면서도 토지가 척박하며 외지고 백성의 풍속이 투박하고 무지하여 유학이 다른 고을들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뒤떨어져 있습니다. 그래도 이전부터 선현의 사당이 있어서 온 고을 선비들이 우러러 의지해 온 지 오래되었는데, 아직까지 사액의 은전을 청하여 그 높이 받드는 정도에 걸맞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신들은 삼가 고루하여 못난 것을 무릅쓰고 감히 그 사실을 자세히 열거하여 조정에 은명(恩命)을 내려 주기를 청하는 바이니, 성상께서는 굽어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신들이 향사하는 사람은 선정신(先正臣) 영의정 박순(朴淳)인데, 박순의 도덕 수준을 신들로서는 정말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신들이 언젠가 삼가 듣건대, 우리 선조 대왕(宣祖大王)께서 지난날 하교하시어 ‘소나무 대나무처럼 꿋꿋한 절조요, 물과 달처럼 맑은 정신[松筠節操 水月精神]’이라고 칭찬하셨다는데, 이 여덟 글자의 말씀은 해와 별처럼 빛나서 외진 고을의 형편없는 학자까지도 외워 전하고 있습니다.
…… 그리고 신들이 삼가 생각건대, 박순과 동시대에 신(臣) 이의건(李義健)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천품이 담박하고 취향과 지조가 고매하여 풍족한 생활 속에서도 이욕(利慾)에 무관심하여 부귀영달이 마음속에 끼어들지 않았던 결과 권세 있는 벼슬에 한 번도 발을 들여놓지 않고 집안에서 효도하고 공경하며 몸을 검속하기를 공손하고 검소하게 하는 것이 여느 사람보다 매우 뛰어났습니다. 그래서 당대의 이름나고 뛰어난 경대부들 중에 그의 기풍과 의리를 흠모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는데, 특히 박순과 이이, 성혼 등이 그와 더욱 친하여 서로 존경하고 추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후의 천거에 대하여 줄곧 사양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간간이 늙은 부모 봉양을 위해 잠시 뜻을 굽히고 벼슬길에 나서기도 하였지만 그의 본심은 아니었습니다.
고(故) 상신(相臣) 이항복(李恒福)이 그를 발탁해서 쇠한 풍속을 진작시키자고 요청하여 파격적인 자급으로 관직을 내렸으나 그는 끝내 사은숙배하지 않고 산림에서 한가로이 지내다가 일생을 마쳤으니, 이는 정말 한 세상의 뛰어난 선비입니다. 논자(論者)들이 그를 한(漢)나라의 황헌(黃憲)과 서치(徐穉)에 견주는 것도 지나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신들이 삼가 생각건대, 이의건의 고결한 행실과 의리는 탐욕스런 사람을 청렴하게 하고 나약한 사람을 굳건하게 할 수 있으며, 그가 평소 신들의 고을에서 많이 생활하여 그가 남긴 풍도(風度)와 뛰어난 기품을 사람들이 아직도 변함없이 사모하고 있으니, 지금 박순의 사당에 배향하여 제향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그러나 감히 자의적으로 결정할 수 없기 때문에 사액을 청하는 소를 올리는 기회에 함께 요청 드리는 바입니다. 만일 성상께서 굽어 살펴 거절하지 않으신다면 그 또한 저희 고을 사류에게 다행일 것입니다. 신들은 절박한 심정으로 간절히 기원해 마지않습니다[伏以儒賢之廟祀書院 本出於多士之景慕 而有國者又必加意奬成 視其道德之崇庳 以施恩典而褒崇之 所以尊賢尙德 風厲士林而興儒化之本原也 …… 惟此永平爲邑 實屬畿輔近地 顧以土地荒僻 民俗樸陋 儒學之盛 不足比他郡邑 而亦嘗有先賢祠廟 以爲一邑多士所瞻依 久矣 而尙未乞賜額之恩 以稱其崇奉 臣等竊恨其固陋不敏 肆敢具列其實 以請命于朝 惟聖明垂察焉 蓋臣等所祀者 卽先正臣領議政朴淳 淳之道德崇庳 臣等誠不足以知之 然竊嘗聞我宣祖大王 嘗下敎褒之曰 松筠節操 水月精神八字 綸音炳若日星 雖窮鄕末學 亦能誦而傳之 …… 臣等且竊見淳同時有臣李義健 其人天資沖澹 趣操高邁 生於綺紈而恬於利欲 富貴榮達 無所入於心 要勢之塗 未嘗一投足 而居家孝悌 律己恭儉 又大過於人 當世之名卿賢大夫。莫不嚮風慕義。而淳及李珥, 成渾。尤與之親善。交相引重。然前後尉薦。輒辭不就 間以親老暫屈 而非其志也 故相臣李恒福請加擢用 以礪衰俗 遂超秩授官 而竟亦不拜 優游山林 以卒其身 此誠一世之高士 而論者以比漢之黃憲 徐穉 亦不爲過也 臣等竊意以爲義健之行義高潔 旣可以廉頑立懦 而其平生游息 多在臣等之邑 遺風逸韻 人猶慕之不衰 今宜追配淳祠 以享俎豆之奉 而顧不敢專 輒敢因請額之疏 而並以是爲請焉 倘蒙聖明俯垂睿察而不以爲不可 則亦一邑多士之幸也 臣等無任激切祈懇之至].”
[의의와 평가]
개항기의 학자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1850~1927]이 우리나라의 고문가(古文家) 아홉 사람을 들면서 김창협의 이름을 빼놓지 않았듯이, 그의 문장은 고문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는 이전의 선진 고문가(先秦古文家)와는 달리 당송(唐宋)의 순정(醇正)한 고문을 체득하여 문장의 품격을 높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우 김창흡(金昌翕)[1653~1722]이 “도(道)와 문(文)을 하나로 합치시켰다.”라고 한 것처럼, 도와 문을 아우른 대표적인 작가로 추숭되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