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0007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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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漢陰文稿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경기도 포천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성환 |
간행 시기/일시 | 1634년 - 『한음 문고』 초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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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 시기/일시 | 1668년 - 『한음 문고』 중간 |
간행 시기/일시 | 1869년 - 『한음 문고』 부록 간행 |
소장처 |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 -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 산56-1 |
성격 | 문헌|전적 |
저자 | 이덕형(李德馨) |
편자 | 이여규(李如圭)|이여황(李如璜) |
간행자 | 이여규[초간] |
권책 | 12권 6책[원집]|4권 3책[부록] |
규격 | 20.5×16.3㎝ |
[정의]
1634년 간행된 포천 출신의 학자이자 문신인 이덕형의 시문집.
[저자]
이덕형(李德馨)[1561~1613]은 조선 중기 포천 출신의 학자이자 문신이다.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漢陰)·쌍송(雙松)·포옹산인(抱雍散人), 아버지는 지중추부사 이민성(李敏聖)이며, 장인은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이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편찬/간행 경위]
이덕형은 많은 시문을 남겼으나 병화를 겪어 대부분 유실되었고, 남은 가장(家藏) 초고를 아들인 상주 목사 이여규(李如圭)와 선산 부사 이여황(李如璜)이 문집으로 간행하려고 하였으나, 1633년(인조 11)에 이여황이 세상을 떠나자 1634년에 이여규가 이준(李埈)의 발문을 받아 상주에서 8권의 목판으로 간행하였다[초간본]. 그 뒤 손자 이상진(李象震)이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서 유문(遺文)을 얻어 외손 이송령(李松齡)이 문집의 간행을 도모하였으나 중단되었다가 손자 이상정(李象鼎)이 다시 간행을 도모하여 『승정원일기』에서 얻은 소차(疏箚)나 계사(啓辭)에 습유(拾遺)·잡저 등을 더 수집하여 1668년(현종 9) 조경(趙絅)의 서문을 받고 상주에서 12권의 목판으로 중간하였다[중간본]. 1869년(고종 6)경에는 연보·비지(碑誌)·행장 등을 엮어 만든 부록이 간행되었다.
[형태/서지]
원집 12권 6책, 부록 4권 3책의 목판본으로, 크기는 20.5×16.3㎝이다.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권1~2는 시로, 오언과 칠언 절구, 오언과 칠언 율시, 오언과 칠언 배율, 칠언 고시가 시체별, 연대별로 편차되어 있고, 중간할 때 넣은 습유가 뒤에 들어 있다. 절구에는 임진왜란 기간에 승군(僧軍)으로 활약하거나 축성에 동원된 승도(僧徒)들과 나눈 시가 많고, 사신으로 두 차례 중국에 다녀오면서 지은 시도 다수 있다. 권3은 표(表)·교서·소차(疏箚)로, 중간 때 새로 넣은 부분이다. 「교왕세자권섭국사서(敎王世子權攝國事書)」는 광해군에게 국사를 권섭(權攝)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권4~7도 소차로, 초간본에 「척정인홍구무양현차(斥鄭仁弘搆誣兩賢箚)」가 더 들어갔다. 권8~9는 계사(啓辭)·헌의(獻議)·정문(呈文)이다. 중간 때 새로 들어간 것으로, 「용전사의(用錢事議)」는 1603년(선조 36)에 영의정으로서 전화(錢貨)의 사용을 주장한 것이다. 권10~11은 간독[편지]인데, 권11의 「답왜장서(答倭將書)」이하 습유까지는 중간 때 넣은 것이다. 110여 편 가운데 이항복에게 보낸 것이 77편이다. 권12는 잡저로, 「회재선생논태극서발(晦齋先生論太極書跋)」과 「제김유신문(祭金庾信文)」 이외에는 모두 중간 때 들어간 글이다.
부록의 연보는 7세손 이기양(李基讓)이 가장 구본(舊本)에 여러 문고 및 제가의 일기에서 추린 내용을 추가하여 만든 것을 7세손 이기락(李基洛)과 9세손 이의익(李宜翼) 등이 교정하였다. 또 여기에 이의익이 묘지(墓誌)·행장·시장(諡狀)·신도비명·본전(本傳)·유사(遺事)를 모아 넣고 국승(國乘)과 야사(野史)에서 뽑은 자료로 보유(補遺)를 만들어 부록 4권으로 편차한 뒤 활자로 간행하였다[부록].
[의의와 평가]
남인 출신으로 북인의 영수 이산해의 사위가 되어 남인과 북인의 중간 노선을 지키다가 뒤에 남인에 가담했던 이덕형의 정치적 입장을 살펴볼 수 있다. 또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중국과 일본을 둘러싼 외교 관계를 직접 주도하였기 때문에 이와 관련한 기초 자료가 된다. 이덕형의 시에 대해서 조경(趙絅)은 “덕인(德人)의 심치(深致)가 있어 일가를 이루었다”고 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