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0007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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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權悰諡號敎旨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문서 |
지역 | 경기도 포천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흥모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711년 - 숙종이 권종에게 ‘충민’이라는 시호를 내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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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시기/일시 | 1832년 - 「권종 시호 교지」 순조가 권종에게 사후 하사 |
성격 | 고문서 |
관련 인물 | 권종 |
용도 | 교지|시호 교지 |
[정의]
1832년 포천 출신의 금산 군수 권종(權悰)에게 시호를 추증한 문서.
[개설]
「권종 시호 교지(權悰諡號敎旨)」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당시 금산 군수(錦山郡守)로서 금산을 방어하다가 왜병에게 죽임을 당한 권종[?~1592]의 공덕을 칭송하여 1832년에 ‘충민(忠愍)’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려 후손에게 주었다는 문서이다. 시호란 사람의 업적이나 학문 등을 고려하여 일정한 절차와 서경(署經)[왕이 신하의 의견을 물음]을 거쳐 국왕이 내리는 칭호를 일컫는다.
권종은 현재의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고모리에서 출생하였고, 이곳에 묘가 있다. 자는 희안(希顔), 본관은 안동(安東), 중림 찰방(重林察訪) 권지식의 아들이다.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재령 현감(載寧縣監)이 되었다. 그 뒤에도 여러 군현의 수령을 지내다 1592년(선조 25) 금산 군수로 부임하였는데, 4월 14일 왜군이 부산진으로 쳐들어오자 곧 의병을 모집하였다. 광주 목사(廣州牧使)로 있던 사촌 동생인 권율(權慄)[1537~1599]과 서로 연락하여 국난에 대처할 것을 기약하고, 먼저 군사를 인솔하여 전주로 갔다.
그러나 전라도 관찰사가 나이가 많다는 이유를 들어 거느린 군사를 빼앗고 군량 관리의 임무만을 맡게 하였다. 6월 20일 왜군이 금산에 이르자 곧 돌아가 병졸 수백 명을 모집하고 제원 찰방(濟源察訪) 이극경(李克絅)과 합세하여 적을 기다리면서 의병장 고경명(高敬命)[1533~1592], 조헌(朝憲)[1544~1592]에게 격문을 보내 지원을 요청하였다. 22일 왜군이 대거 내습하여 오자 전투를 벌였는데, 다음날 전투 끝에 아들 권준(權畯)과 함께 순절하였다. 금산 군민들이 충의에 감복하여 시신을 거두어 포천의 선영(先塋)에 장사지냈다.
후에 선조가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탄식과 애도를 표하고 정려(旌閭) 건립을 명하였다. 정려각은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고모리에 있다.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고, 금산에 순의비(殉義碑)가 세워졌다.
[제작 발급 경위]
임진왜란 때 순절한 권종은 1710년(숙종 36) 정려되었고, 1711년(숙종 37) 충민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권종 시호 교지」는 1832년(순조 32)에 받은 교지이다.
[형태]
재질은 홍지(紅紙)이며 규모는 가로 93㎝, 세로 60㎝이다.
[구성/내용]
「권종 시호 교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경연 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행 통훈대부 금산 군수 전주 진관 병마첨절제사 권종에게 충민공이라는 시호를 내리니 환란에 임해 나라를 잊지 않았으니 충이라 하고 나라가 어려움을 만났으니 민이라 한다. 도광 십이년[贈資憲大夫 吏曹判書 兼知經筵 義禁府事 五衛都摠府都摠管 行通訓大夫 錦山郡守 全州鎭管 兵馬僉節制使 權倧 贈諡忠愍公者 臨患不忘國曰忠 在國逢難曰愍 道光 十二年].
[의의와 평가]
「권종 시호 교지」는 임진왜란 때 전사한 권종의 사후, 국가적인 예우에 대한 과정을 알려 주는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