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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리 태봉 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000846
한자 金珠里胎封址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터
지역 경기도 포천시 영중면 금주리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김동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96년 9월연표보기 - 금주리 태봉 터 단국 대학교 사학과에서 지표 조사 시작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98년 4월연표보기 - 금주리 태봉 터 단국 대학교 사학과에서 지표 조사 종료
소재지 금주리 태봉 터 소재지 - 경기도 포천시 영중면 금주리 (N37°57'58"/ E127° 15'32")지도보기
성격 태봉 터

[정의]

경기도 포천시 영중면 금주리에 있는 조선 시대 태봉 터.

[개설]

태봉(胎封)은 태실(胎室)·태봉(胎峰)·태봉(台峰)·태묘(胎墓)·태장봉(胎藏峰)·태산(胎山)·태뫼 등으로 불리는데, 산모가 태아를 출산한 후 나오는 태반(胎盤)을 묻는 장소를 의미한다. 왕실의 태봉은 왕자·왕녀의 태반을 매장하는 장소를 말하며, 태반을 항아리에 보관한 후 미리 정해진 태봉에 태실(胎室)을 조성하고 태 항아리와 지석을 묻는 절차를 장태(藏胎) 혹은 안태(安胎)라고 한다.

조선 왕실에서 태장을 중요하게 여긴 이유는 풍수적 이유 때문인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즉 『세종실록(世宗實錄)』에 “남자의 태가 좋은 땅을 만나면 총명하여 학문을 좋아하고 벼슬이 높으며 병이 없을 것이요, 여자의 태가 좋은 땅을 만나면 얼굴이 예쁘고 단정하여 남에게 흠앙(欽仰)을 받게 되는데……”라는 기록에서 보듯이 태가 사람의 인생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다.

『문종실록(文宗實錄)』에도 “태장경(胎藏經)에 이르기를, 대체 하늘이 만물을 낳는데 사람으로서 귀하게 여기며, 사람이 날 때는 태로 인하여 장성하게 되는데, 하물며 그 현우(賢愚)와 성쇠(盛衰)가 모두 태에 매여 있으니 태란 것은 신중히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태의 명칭에 대해서는 ……육안태법(六安胎法)을 정하였다”라고 하였고, 『성종실록(成宗實錄)』에도 “왕대비의 전교에 이르기를, 일반 사람은 반드시 모두 가산(家山)에다가 태를 묻는데……”라고 기록된 것을 보면 사가에서도 태를 매장하였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이와 같이 왕실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도 성행한 장태 풍속(藏胎風俗)은 인간 생명에 대한 외경과 존중심을 잘 나타내는 고유문화의 하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풍수적 길지에 장태함으로써 차손(次孫)의 잉태, 당사자의 무병장수 및 장래 성장의 긍정적 영향을 기대하였다고 할 수 있다.

[변천]

우리나라에서 태를 봉안하는 제도가 처음 시작된 시기는 마한과 가야에서 시행되었다는 것이 구전(口傳)으로 전하고 있으나, 실제 태실이나 태봉의 흔적이 약간 있을 뿐 태실의 구조는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 문헌상으로 나타난 최초의 장태 기록을 통해 태실의 조영(造營)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신라의 김유신(金庾信) 태실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고려 시대에도 장태 제도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중국에서도 태를 묻는 풍속이 당(唐)나라 때 이미 시행되고 있었다.

『세종실록』에 “음양학을 하는 정앙(鄭秧)이 글을 올리기를, ……당나라 일행(一行)이 저술한 육안태(六安胎)의 법에 말하기를…… 일행과 왕악(王岳)의 태를 간수하는 법에 의거하여 길지를 가려서 이를 잘 묻어 미리 수(壽)와 복을 기르게 하소서”라는 기록이 있고, 『문종실록』에도 “태장경에 이르기를 ……육안태법을 정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조선조 세종문종 때 이미 중국 당대(唐代)의 안태 풍속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일찍이 태를 묻는 풍속은 있었지만 석실이나 태실의 구조는 찾아볼 수 없고, 중국의 『사원(辭源)』과 『대백과 전서(大百科全書)』 등에서도 장태·태실·태봉 등의 단어를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장태 제도는 우리 고유의 풍속임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선조 수정 실록(宣祖修正實錄)』에 “태경(胎經)의 설이 시작된 것은 신라·고려 사이이고, 중국에 예로부터 있었던 일은 아니다”라고 명시된 것에서 유추할 수 있다.

[위치]

금주리 태봉 터포천시 신북면 만세교의 동쪽 태봉 정상에 있던 태실로, 현재 남아 있지 않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1996년 9월~1998년 4월 금주리 태봉 터에 대해 단국 대학교 사학과에서 지표 조사를 하였다.

[현황]

1988년 『포천군의 역사와 문화 유적』이 발행될 당시 포천시 영중면 금주리 주민 김진영의 말에 의하면, 1990년대 초·중반 인근 군부대가 공사를 할 때 둘레 1m가량 되는 가마솥 형태의 석재가 뒤집어진 채로 출토되었으나 다시 매몰하였다고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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