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000859 |
---|---|
한자 | 雲岳山城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경기도 포천시 화현면 화현리 산202 |
시대 | 고려/고려,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동민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758년 - 운악산성 『견성지』에 소개됨 |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97년 2월 - 운악산성 육군 사관 학교 육군 박물관에서 지표 조사 시작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97년 7월 - 운악산성 육군 사관 학교 육군 박물관에서 지표 조사 종료 |
현 소재지 | 운악산성 - 경기도 포천시 화현면 화현리 산 202 |
성격 | 산성 |
면적 | 약 3.96㎢ |
[정의]
경기도 포천시 화현면 화현리에 있는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는 산성.
[건립 경위]
운악산성(雲岳山城)에 대해서는 조선 후기에 쓰인 『견성지(堅城誌)』에서 “현의 동쪽 25리에 있다. 가평 현등산 서악이다. 봉우리 꼭대기에 옛 대궐 터가 있다”라고 하는 것 이외에 이렇다 할 기록이 없다. 따라서 축조 양식이나 수습된 유물을 통하여 추정할 수밖에 없다. 우선 축조 방식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면 ①매우 험준하고 높은 입지를 선택하였다는 점 ②절벽이 많은 험준한 지대여서 전 성벽선 가운데 한정된 구역에만 쌓았기 때문에 노동력이 비교적 적게 들었다는 점 ③축성 방식의 계획성이 떨어지며 타(垜)[갈라진 여장(女墻)의 한 부분]의 구분이 없는 낮고 편평한 평여장(平女墻)[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을 택하고 있다는 점을 특성으로 들 수 있다.
이러한 특성을 갖는 산성은 고려 시대 이후 갑작스러운 외침에 대비하여 축조한 사례가 많다. 이로 미루어 보아 고려 시대에 긴급한 상황에 축조된 것이라는 추정이 유력하다. 한편 운악산성에서 수습되는 유물을 통하여 산성의 사용 시기를 추정해 볼 수 있다. 운악산성에서 발견된 기와와 토기는 주로 고려 시대~조선 시대에 사용된 것으로 건물 터의 성격을 말해 준다고 하겠다. 따라서 운악산성은 고려 시대 거란[契丹]·몽고(蒙古)·합단(哈丹) 침입 시, 혹은 고려 말 왜구와 홍건적의 침입이 극심한 시기에 시급히 축조되어 사용되다가 곧 폐기된 것이라고 여겨진다.
[위치]
운악산성은 포천과 가평 사이에 위치한 매우 험준한 운악산[현등산]에 축조한 산성으로, 포천시의 화현면·일동면·신북면·군내면 일대에 대한 조망이 양호한 곳에 위치하며, 운악산 서쪽 비탈면에 축조되었다. 주소지는 포천시 화현면 화현리 산202번지이다.
[형태]
운악산성은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극히 적은 부분만 성벽을 축조하였다. 성벽은 운악산 정상에서 북쪽으로 뻗은 능선과 남쪽의 일부 구간에만 축조되었고, 나머지 부분은 대부분 절벽 혹은 암석으로 된 급경사로 되어 있기 때문에 성벽 축조가 필요하지 않은 상태이다. 운악산성은 구간의 여건에 따라 내탁(內托)[자연석으로 바깥쪽을 물림 쌓기로 축성하고 안쪽은 흙과 잡석으로 밋밋하게 쌓아 올린 공법], 혹은 협축(夾築)[성을 쌓을 때 중간에 흙이나 돌을 넣고 안팎에서 돌을 쌓는 방법]을 하였으며, 성돌은 대개 화강암 계통의 자연석, 혹은 반치석하여 사용하였다.
쌓는 방식은 장방형 쌓기를 의도하였으나 성돌이 반듯하지 않기 때문에 가로 열을 대충 맞추어 나가는 방식을 취하였다. 운악산성은 성돌을 모아 쌓은 구간이 많지 않은데다가 대부분 완전 붕괴되었기 때문에 성벽 위에 어떤 시설이 있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다만 남쪽 성벽에서 성문 터로 추정되는 곳이 확인된다. 산성의 위치로 보아 운악산 정상 쪽, 그리고 무지치 폭포[무지개 폭포] 서북쪽에 성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는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면적은 약 3.96㎢[120만 평]이다.
[현황]
운악산성은 성벽이 대부분 붕괴되었고, 무지치 폭포 동북쪽 능선에 남아 있는 성벽만이 비교적 잘 남아 있어서 산성의 축조 방식을 알게 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