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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평리 절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000888
한자 都平里寺址
분야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터
지역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도평리 657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고려/고려,조선/조선
집필자 김동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96년 9월연표보기 - 도평리 절터 단국 대학교 사학과에서 지표 조사 시작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98년 4월연표보기 - 도평리 절터 단국 대학교 사학과에서 지표 조사 종료
소재지 도평리 절터 -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도평리 657
소재지 도평리 절터 -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도평리 662-1[N38°05'19.1"/E127°22'22.7"]지도보기
출토 유물 소장처 포천시청 공보실 - 경기도 포천시 중앙로 87[신읍동 58-2]지도보기
성격 절터
지정 면적 11,220㎡

[정의]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도평리에 있는 통일 신라 시대에서 조선 시대에 이르는 절터.

[개설]

도평리 사지 또는 약사지(藥寺址)라고도 한다. 통일 신라 말 또는 고려 시대에 창건되었다가 조선 시대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절의 이름이나 창건 연대, 폐사 기록 등이 전혀 전하지 않는 절터이다. 다만 인근의 지명에 ‘약사골’, ‘약사령’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전하는 바대로 ‘약사(藥寺)’가 있었다고 추론될 뿐이다.

[변천]

도평리 절터는 1970년대부터 약 10년의 시차를 두고 조사가 이루어졌다. 1977년에 편찬된 『문화 유적 총람』에도 “신라 말엽에 세운 약사지에 3층 석가탑이 유존(遺存)했다고 전하나 사지는 경작지화되어 있고 가로 40㎝, 세로 30㎝의 석등 하대석(下臺石)으로 판단되는 석물 2기가 잔존하고 있을 뿐 유래는 미상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1988년에 편찬된 『기내 사원지』에는 “도평리 사지 또는 약사지라고 불리는 이 절터에는 현재 크게 파손된 대규모의 석축과 고려 시대의 작품으로 보이는 부도의 깨어진 대좌가 남아 있어 대략 고려 시대부터 절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 절 이름을 확증시켜 줄 유구의 명문은 아직까지 알려진 바 없다. 십여 년 전에도 절터에 연화 대좌가 있었다고 하며 절터→밭→논→삼밭으로 바뀌는 과정을 거치면서 땅거죽에 있던 유물은 없어지거나 파괴되었고, 부근에 군사용 도로를 내면서 석축 일부를 헐어 사용하였다고 하며 이때 남아 있던 석조 유물들 대부분이 파괴되었다고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위치]

도평천 상류에 위치한다. 295m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장암리에서 도평리로 가는 국도 47호선[금강로]을 따라 가다보면 왼쪽에 도평 3리[내약사] 방향으로 꺾어지는 표지석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서쪽으로 꺾어져서 금강로 6263번 길에 올라타서 가다보면 제9871부대 201대대가 나온다. 계속 직진하여 가게 되면 우측에 안약사 버스 정류장과 준희네 민박이 보인다. 이를 지나 더 가게 되면 오른쪽에 글씨가 없는 큰 돌과 건물이 보이고 가드레일이 끊어진 곳이 보이는데 그 오른쪽 경작지가 도평리 절터이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1996년 9월부터 1998년 4월 사이에 단국대학교 사학과에서 지표 조사를 실시하였다. 1997년에 편찬된 『포천 군지』에는 “30여 년 전에 이곳을 경작지화할 당시에 불도저를 사용하는 바람에 사찰과 관련된 유적과 유물이 모두 망실되었다”라고 하면서 당시 포천군 이동면 도평리 662-1번지에 거주하며 도평리 절터를 경작하였던 현지 주민 오석균의 증언을 바탕으로 이전보다 구체적으로 현황을 추론하였다.

첫째, 약 30여 년 전에는 사찰의 규모를 짐작할 만한 유구와 유물이 노출되어 있었다. 둘째, 8개의 주춧돌이 있었다는 증언은 이곳 절터에 적어도 7칸 규모의 건물이 있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셋째, 5명이 앉아서 술상을 보아도 될 만큼 큰 돌은 바로 불상 대좌였음을 추론케 하고, 이는 개간 시 출토되었다고 하는 철제 손을 지녔던 부처의 대좌로 추정된다. 넷째, 개간 당시 출토되었다는 부처의 손이 금으로 도금된 철제였다는 점은 바로 이곳에 철불이 있었음을 강력히 제시한다. 더욱이 사찰의 명칭이 ‘약사’였다는 점으로 미루어 이 불상이 약사여래(藥師如來)가 아니었을까 추정한다. 아울러 손의 무게만 약 5㎏정도였다는 점은 이 불상의 규모가 거대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현황]

현재 도평리 절터 전체는 계단식 경작지로 이용되고 있으며, 면적은 약 1만 1220㎡[3,400여 평] 규모이다. 전체적으로 남서향이며 절터에서 일부 석축이 확인되나, 경작지 석축으로 전해지고 있다. 과거에는 주춧돌 등의 석물이 남아 있었다고 하나, 40여 년 전 경작지화할 당시 망실되었다고 한다. 인근 민가에서는 절터에서 출토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치석재(治石材)가 정원석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계단의 소맷돌로 추정된다. 개간 당시 발굴된 놋그릇과 부처 손은 포천시청 공보실에 소장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 조선 시대 여러 지리지에도 도평리 절터에 관한 기록이 전혀 없어, 창건 시기나 운영 종파 및 폐사에 관한 정보를 알 수 없다. 단순 지표 조사와 인터뷰를 통해 절터로 규정된 유적으로, 추가적인 발굴 등 정밀 조사를 통해 객관적인 정보를 축적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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