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0009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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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保架山城址 |
이칭/별칭 | 보개산성(寶蓋山城),궁예성지,궁예대왕각대성지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경기도 포천시 관인면 중리 산251-1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김덕원 |
문화재 지정 일시 | 1986년 04월 09일 - 보가산 성지 포천시 향토 유적 제36호로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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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보가산 성지 소재지 - 경기도 포천시 관인면 중리 산251-1 |
성격 | 성터 |
문화재 지정 번호 | 포천시 향토 유적 제36호 |
[정의]
경기도 포천시 관인면 중리에 있는 남북국 시대에서 조선 후기 성터.
[개설]
보가산 성지(保架山城址)는 일명 보개산성(寶蓋山城)이라고도 하는데, 보가산성(保架山城)이란 명칭도 여기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산성의 북벽과 서벽은 자연적인 지형에 일부 석축을 가하고 북벽과 동벽은 절벽을 이용하여 축조한 산성이다. 산성 서쪽에는 해발 877m의 지장봉(地藏峰)·화인봉(花人峰)·북대(北臺) 등 높은 산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러져 있고, 이 산들과 보가산성이 축조된 해발 426m 산 사이에는 긴 계곡이 남북 방향으로 형성되어 있다.
성 동쪽에는 해발 644m 고남산(古南山)이 있으며, 북쪽에는 해발 947m 금학산(金鶴山)이 자리하고 있다. 남쪽에는 성의 서쪽 계곡을 흐르는 개울물을 막은 중리 저수지가 있고, 저수지 건너편에는 해발 642m 종자산(種子山)이 자리하고 있다. 지장봉 넘어 서쪽으로는 연천군, 고남산 동쪽으로는 포천시 영북면 운천리가 이웃하고 있다. 보가산 성지가 위치한 지역은 이 일대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중심부가 된다.
[변천]
보가산 성지는 1530년(중종 25)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보개산성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1908년(순종 2)에 편찬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폐성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을 참조하면 보가산 성지는 조선 후기까지는 붕괴된 정도가 심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위치]
포천시 영중면에서 연천군 전곡읍으로 가는 국도 37호선을 따라가다가 창수면 오가리에서 철원으로 가는 길로 우회전하여 약 8㎞를 가면 관인면 중리가 나온다. 여기에서 중리 저수지 쪽으로 좌회전하여 저수지를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저수지 끝나는 부분에서 다시 삼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에서 우회전하여 좁은 계곡을 따라 약 4㎞를 올라가면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다. 주소지는 포천시 관인면 중리 산251-1번지이다.
[현황]
보가산 성지는 둘레 약 4.2㎞이고, 형태는 남북이 동서보다 두 배 이상 긴 변형된 사변형 모양이다. 산성의 대부분은 파괴되었고, 현재는 서벽 중에서 네 곳에 불연속적으로 석축이 남아 있으며, 북벽의 10여 곳에도 성벽이 불연속적으로 남아 있다. 산성의 동쪽과 남쪽은 절벽으로 이루어져 성벽을 축조할 필요가 없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석벽이 가장 잘 남아 있는 곳은 서벽으로 특히 세 계곡을 차단하고 있는 성의 길이를 합하면 75m에 해당된다. 그리고 문 터[門址] 1개소, 우물 1개소, 추정 건물 터 2개소 등이 확인되었다. 보가산 성지는 1986년 4월 9일 포천시 향토 유적 제36호로 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보가산 성지는 대부분 급경사와 절벽으로 이루어진 지형적인 영향으로 대규모의 병력이 주둔하여 장기전을 펼치는 기능이 아니라 소규모의 병력이 주둔하였던 일종의 차단성 내지는 보루성의 성격으로 추정된다. 한편 보가산 성지는 태봉(泰封)의 궁예(弓裔)가 축조하였다고 하여 ‘궁예 성지(弓裔城址)’라고도 전한다. 특히 일제 강점기에 간행된 『조선 보물 고적 조사 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에는 이 산성을 ‘궁예 대왕 각대성지(弓裔大王閣岱城址)’라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지역에 전하는 전설에도 태봉 국왕 궁예가 부하 장군 왕건(王建)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쫓길 때 왕건 군과 싸운 성터로 설명하고 있다. 또 성안에는 ‘궁예 왕 대궐 터’나 ‘궁예 왕 우물 터’ 등의 이름이 지금까지 전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