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0009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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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興根 |
이칭/별칭 | 기경(起卿),유관(遊觀),충문(忠文)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수입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의환 |
출생 시기/일시 | 1796년 - 김흥근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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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13년 - 김흥근 증광시 생원 3등 합격 |
활동 시기/일시 | 1825년 - 김흥근 알성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837년 - 김흥근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옴 |
활동 시기/일시 | 1853년 - 김흥근 판중추부사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862년 - 김흥근 이정청 총재관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864년 - 김흥근 지실록사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834년 6월 25일 - 김흥근 이조참의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835년 1월 12일 - 김흥근 전라도 관찰사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839년 4월 3일 - 김흥근 이조참판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839년 5월 10일 - 김흥근 규장각 직제학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840년 2월 21일 - 김흥근 홍문관 부제학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841년 2월 26일 - 김흥근 평안도 관찰사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842년 7월 3일 - 김흥근 호조판서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842년 8월 24일 - 김흥근 형조판서 제수(1842년) |
활동 시기/일시 | 1842년 9월 23일 - 김흥근 사헌부 대사헌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842년 12월 3일 - 김흥근 한성부 판윤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842년 12월 25일 - 김흥근 공조판서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843년 윤7월 29일 - 김흥근 형조판서 제수(1843년) |
활동 시기/일시 | 1843년 8월 25일 - 김흥근 예조판서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844년 1월 6일 - 김흥근 병조판서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844년 1월 25일 - 김흥근 규장각 제학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845년 7월 6일 - 김흥근 이조판서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846년 7월 14일 - 김흥근 의정부 좌참찬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848년 6월 27일 - 김흥근 경상도 관찰사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851년 2월 2일 - 김흥근 좌의정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851년 5월 26일 - 김흥근 실록청 총재관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852년 1월 - 김흥근 영의정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865년 1월 9일 - 김흥근 영돈령부사로 치사 |
몰년 시기/일시 | 1870년 8월 17일 - 김흥근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874년 12월 17일 - 김흥근 충문 시호 받음 |
거주|이주지 | 김흥근 거주지 -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수입리 웃갈리 |
유배|이배지 | 김흥근 유배지 - 전라남도 광양시 |
묘소|단소 | 김흥근 묘소 -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기산리 46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안동(安東) |
대표 관직 | 영의정 |
[정의]
조선 후기 포천 지역에서 활동한 문신.
[가계]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기경(起卿), 호는 유관(遊觀). 증조할아버지는 김달행(金達行)이고, 할아버지는 김이경(金履慶)이다. 아버지는 이조 참판을 지낸 김명순(金明淳)이며, 어머니는 신광온(申光蘊)의 딸이다. 형은 좌의정을 지낸 김홍근(金弘根)이다.
[활동 사항]
김흥근(金興根)[1796~1870]은 1825년(순조 25) 알성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대교·겸보덕(兼輔德)·이조 참의·전라도 관찰사 등을 지냈고, 1837년(헌종 3) 동지 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후 이조 참판·규장각 직제학·홍문관 부제학·평안도 관찰사 등을 거쳐 1841년(헌종 7) 형조 판서가 되었다. 이어 대사헌, 한성부 판윤, 공조 판서, 호조 판서, 예조 판서, 규장각 제학, 이조 판서를 지냈다.
1848년(헌종 14) 예조 판서를 거쳐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대사간 서상교(徐相敎)의 탄핵으로 전라남도 광양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철종이 즉위하자 유배에서 풀려났고, 그 해 12월 한성부 판윤이 되었다. 이어 이조 판서를 거쳐 1851년(철종 2) 좌의정이 되었고, 『헌종실록(憲宗實錄)』 편찬 총재관이 되었으며, 이듬해 영의정이 되었다. 1862년(철종 13) 이정청 총재관이 되었으며, 1864년(고종 1) 『철종실록(哲宗實錄)』 편찬 때 지실록사(知實錄事)가 되었다. 1865년(고종 2) 영돈령부사로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다.
[묘소]
묘는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기산리 46번지에 있으며, 포천시 향토 유적 제31호로 지정되어 있다. 묘소에는 1단의 호석이 둘러진 원형의 봉분 앞에 묘비와 상석·향로석·망주석이 설치되어 있다. 묘의 오른쪽 묘비는 1876년(고종 13)에 건립된 것으로 팔각지붕 형태의 옥개와 장방형의 비좌를 갖추었다. 비문은 이경재(李景在)가 짓고, 글씨는 송근수(宋近洙)가 썼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충문(忠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