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001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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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宋時喆 |
이칭/별칭 | 설촌(雪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길명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성환 |
출생 시기/일시 | 1610년 - 송시철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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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673년 - 송시철 사망 |
묘소|단소 | 송시철 묘소 -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길명리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여산(礪山) |
대표 관직 | 병조 참의 |
[정의]
경기도 포천지역에 묘가 있는 조선 후기 문신.
[가계]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숙보(叔保), 호는 설촌(雪村). 외할아버지는 첨정 김흡(金洽)이고, 아버지는 예조 참의 송극인(宋克認)이다. 아내는 목사 정지경(鄭之經)의 딸이다.
[활동 사항]
송시철(宋時喆)[1610~1673]은 1633년(인조 11) 사마시에 합격하여 헌릉 참봉·종묘서 부봉사·상서원 부직장을 역임하였다. 선공감 감역으로 있을 때 무망중(無妄中)에 죄에 연루되어 임피현으로 귀양갔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아버지의 상중(喪中)이었는데, 다시 어머니 상을 당해 귀양살이에 매인 몸임에도 상례(喪禮)를 준봉하였다. 상을 마치고 내자시 주부를 제수 받았고, 장례원 사평·공조좌랑으로 옮겼다.
1653년(효종 4)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병조좌랑·사간원 정언을 거쳐 형조좌랑으로 옮겼고, 고산 찰방으로 나갔다가 정언으로 옮겼다. 또 황해도 도사로 나갔다가 사소한 일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이후 예조정랑을 거쳐 사헌부 장령에 올랐다. 시강원 사서로 임명되어서는 송준길(宋浚吉)이 매일 서연(書筵)에 입시하여 힘썼는데, 이를 주선하여 많은 도움을 주어 송준길로부터 세한(歲寒)의 사귐이 되자는 부탁을 들었다.
정언·장령을 거쳐 성균관 사성이 되어서는 서장관으로 연경(燕京)에 갔다가 돌아와 밀양 부사가 되었는데, 백성을 어루만짐을 최우선으로 하고 노인을 봉양하고 기아를 구제하는 데 힘썼으며, 호족들을 억제하고 교활한 서리들을 제압함에 위엄이 있었다. 효종이 승하하였을 때 부(府)의 인사들이 북소리를 듣고도 대부분 나오지 않음에, 그가 방(榜)을 걸어 대의(大義)를 밝히자 부민들이 모두 통곡하며 왕의 죽음을 슬퍼하였다.
1661년(현종 2) 이후 헌납 6차례, 장령 11차례, 집의 8차례, 사간 5차례를 지냈는데, 그 사이 상의원·사복시·장악원·봉상시·군자감 등의 장(長)을 역임하였다. 대각(臺閣)에서 중요한 의논이 있을 때마다 반드시 참여하여 오직 의(義)로써 의논하고 구차하게 피하는 계책을 피지 않았으며, 지론이 공명정대하여 남의 허물을 들추어내거나 자신을 자랑하기를 좋아하지 않아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하였다.
성균관에서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문묘(文廟)에 배향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소가 있은 지 오래 되었으나 회보가 없어 그가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를 진달하고, 임금의 뜻에 저촉된 간신(諫臣)을 변론하였으나, 왕의 비지(批旨)로 체직되었다. 또 얼마 후 전 장령 이무(李堥)가 신임 정승이 인망(人望)에 부응하는 인물이 아니라고 상소하여 그가 강력하게 간쟁함에 왕이 더욱 노하여 두 사람을 모두 유배할 것을 명하였다. 하지만 여러 대신이 구명하여 삭직하는 것으로만 조정되었다.
1667년(현종 8) 동부승지로 발탁되어 왕이 온천에 거둥할 때 호종하여, 돌아와서 구마(廐馬)를 하사받았다. 이때부터 잠깐 체직되고 다시 복직되어 승정원에 들어간 것이 7차례였고, 전직되어 좌승지에 이르렀다. 이후 공조·형조에서 참의를 지내고, 병조에서는 참지·참의를 지냈다. 승정원에 있으면서는 사안에 따라 논변하였는데, 사헌부·사간원에서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을 탄핵하기라도 하면 왕이 진노하여 신료들의 자리가 온통 비게 될 경우가 있었으나, 그는 이미 내려진 명을 철회케 하는 등 그 직분을 잃지 않았다.
원주 목사가 되어서는 학교에 관한 정책을 첫 번째로 일으키고, 제기(祭器)를 수선하고 제조하여 삭망(朔望)에 몸소 나아가 제사를 받들고, 고을의 자제들을 모아 늠료(廩料)를 주며 학문에 힘쓸 것을 권하였다. 흉년에는 여러 요역(徭役)과 부역을 견감해 주고, 견감할 수 없는 자들에겐 관곡(官穀)을 대신 주어 백성들이 이에 힘입어 소생하였다. 그런데도 창고에는 얻은 곡식이 오히려 1,000여 석이나 되었다고 한다. 병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가려다가 위독해져 임지에서 죽었다. 임종에 앞서 여러 자식에게 형제간에 우애롭게 지내는 데 힘쓸 것과 자신을 위해서는 깊이 논의하지 말 것을 경계하였다. 어려서부터 시서(詩書)에 종사하고 일체의 외모(外慕)를 물리쳤고, 여러 아들을 가르칠 때도 그러하였다는 평이 있다.
[묘소]
묘는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길명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부음이 알려지자 현종이 특별히 부의(賻儀)를 내렸다. 묘지명은 박세채(朴世采)가 짓고, 비문은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