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0010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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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楊士奇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기지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최동원 |
출생 시기/일시 | 1531년 - 양사기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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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586년 - 양사기 사망 |
출생지 | 양사기 출생지 -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기지리 |
묘소|단소 | 양사기 묘소 - 경기도 포천시 군내면 하성북리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청주(淸州) |
대표 관직 | 원주 목사 |
[정의]
조선 전기 포천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응우(應遇), 호는 죽재(竹齋). 아버지는 돈령부 주부를 지낸 양희수(楊希洙)이다. 양사준(楊士俊)과 「태산가」를 지은 문인이자 서예가인 양사언(楊士彦)이 형이다. 양사기(楊士奇)[1531~1586] 삼형제가 모두 시에 뛰어났으며 대과에도 급제해 세상에서 평판이 높았다.
[활동 사항]
양사기는 지금의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기지리에서 출생하였다. 1552년(명종 7) 생원시와 진사시에 각각 3등[53위/ 58위]으로 합격하고, 이듬해 별시 문과 병과 16위로 급제하였다. 문과에 급제한 이후 호조 좌랑을 거쳐 원주, 부평 등 일곱 개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청렴하여 칭송을 받았다. 선조가 즉위한 뒤에 상소를 올려 외적의 침범에 대한 방어 대책을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586년(선조 19) 병으로 앓아눕자 스스로 죽을 날을 점쳤는데, 틀림이 없이 예견한 그날 56세로 죽었다.
[묘소]
묘는 경기도 포천시 군내면 하성북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