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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001022
한자 兪瑒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유동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명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14년연표보기 - 유창 출생
몰년 시기/일시 1692년연표보기 - 유창 사망
출생지 유창 출생지 -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유동리
묘소|단소 유창 묘소 -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유동리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창원(昌原)
대표 관직 호조참판

[정의]

조선 후기 포천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백규(伯圭), 호는 추담(楸潭)·운계(雲溪). 아버지는 서윤(庶尹) 유여해(兪汝楷)이며, 부인은 전주 이씨(全州李氏)이다. 아들은 효자 정려를 받은 유회일(兪晦一)이다.

[활동 사항]

유창(兪瑒)[1614~1692]은 지금의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유동리에서 태어났다. 1635년(인조 13) 생원이 되고 1650년(효종 1) 과거에 급제하였다. 1653년(효종 4) 벼슬아치들이 모여 칠석(七夕)에 대한 시를 지을 때 으뜸을 차지하였다. 또한 1655년(효종 6) 춘당대(春塘臺)에서 무재(武才)를 시험할 때도 으뜸을 차지하여 말을 하사받을 정도로 문무에 두루 능하였다. 이후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오고 동부승지·충청도 관찰사·우부승지·강원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663년(현종 4) 예조참의와 판결사를 지낸 후 광주 부윤으로 나아갔으나 때마침 부친상을 당하는 바람에 교체되었다.

1666년(현종 7) 수원 부사로 재직 중 진상물을 병조 판서에게 임의로 주었다가 발각되어 파직되고 강원도 철원의 풍전역(豊田驛)에 유배되었다. 이후 복직되어 병조참판을 지냈으며, 1674년(현종 15) 고부사(告訃使)가 되어 현종 비의 상을 청나라에 알리고 돌아왔다. 이때 서장관 권해(權瑎)와 사적인 틈이 생겨 공무 수행에 소홀했다는 사헌부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682년(숙종 8) 판부사 김수흥(金壽興)이 유창을 일컬어 “고요하고 겸퇴(謙退)하는 기절(氣絶)이 있다.”며 천거하자 임금이 특별히 공조참판으로 승진시켰다. 승지와 호조참판을 거쳐 1689년(숙종 15) 개성 유수를 역임했으며, 낙향하여 여생을 고향에서 지냈다. 이때 호를 추담이라 지었다. 현재 일동 레이크 골프클럽[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유동리 21-2번지] 안에 위치한 원통사(圓通寺) 창건에 기여하였으며, 사찰 앞 바위에 새겨진 ‘원통 폭포(圓通瀑布)’라는 글씨를 쓴 것으로 전한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 『추담집(楸潭集)』이 있다.

[묘소]

묘는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유동리 용호동에 있으며, 부인 전주 이씨와 합장 형태이다.

[상훈과 추모]

1689년 이후 2품 벼슬을 역임하고 사망한 대신들은 일정한 법식에 따라 추제(追祭)를 지냈는데, 이단하(李端夏)와 유창은 제외되었다. 이들이 세상을 떠날 때 임금의 특명이 있었기 때문에 제사를 거행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1694년(숙종 20)에 이르러 승지 박치도(朴致道)가 건의하여 이들에 대한 추제가 실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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