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0010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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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敬輿 |
이칭/별칭 | 직부(直夫)|백강(白江)|봉암(鳳巖)|문정(文貞)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포천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우석 |
추모 시기/일시 | 1683년 - 이경여 문정 시호 받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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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시기/일시 | 1585년 1월 9일 - 이경여 출생 |
몰년 시기/일시 | 1657년 8월 8일 - 이경여 사망 |
출생지 | 이경여 출생지 - 서울특별시 |
낙향지 | 이경여 낙향지 - 충청남도 부여군 |
유배|이배지 | 이경여 유배지 - 전라남도 진도군 |
유배|이배지 | 이경여 이배지 - 함경남도 |
유배|양이지 | 이경여 양이지 - 충청남도 아산시 |
유배|구류지 | 이경여 구류지 - 중국 랴오닝 성 심양 |
묘소|단소 | 이경여 묘소 및 신도비 - 경기도 포천시 내촌면 음현리 산28 |
사당|배향지 | 부산 서원 - 충청남도 부여군 |
사당|배향지 | 봉암사 - 전라남도 진도군 |
사당|배향지 | 동산 서원 - 전라북도 고창군 성내면 |
선정비 | 이경여 선정비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 2가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전주(全州) |
대표 관직 | 영의정 |
[정의]
경기도 포천지역에 묘가 있는 조선 후기 문신.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직부(直夫), 호는 백강(白江)·봉암(鳳巖). 세종의 7세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광원수(廣原守) 이구수(李耉壽)이고, 할아버지는 첨정을 지낸 이극강(李克綱)이다. 아버지는 목사를 지낸 이수록(李綏祿)이며, 어머니는 송제신(宋濟臣)의 딸인 진천 송씨(鎭川宋氏)이다. 첫째 부인은 영의정 윤승훈(尹承勳)의 딸인 해평 윤씨(海平尹氏)이고, 둘째 부인은 별좌 임경신(任景莘)의 딸인 풍천 임씨(豐川任氏)이다. 첫째 부인에게는 자녀가 없고 둘째 부인에게서 4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로 부사 이민장(李敏章), 대사헌 이민적(李敏迪), 판서 이민서(李敏敍), 지평 이민채(李敏采)가 있고, 사위로 현감 이준(李懏)과 박세격(朴世格)이 있다.
[활동 사항]
이경여(李敬輿)[1585~1657]는 1601년(선조 34) 사마시를 거쳐 1609년(광해군 1)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610년(광해군 2) 검열이 되었고 설서·대교를 거쳐 1612년(광해군 4) 봉교·공조 좌랑을 거쳐 정언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14년(광해군 6) 직강을 거쳐 사서가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15년(광해군 7) 경기 도사가 되었고, 1617년(광해군 9) 충원 현감이 되었다. 1619년(광해군 11) 광해군의 실정이 심해지자 벼슬을 버리고 흥원강(興元江) 가에 우거하였다.
1623년(광해군 15)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부수찬이 되었고, 이후 교리, 헌납, 이조 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왕을 공주로 호종하고, 이어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이 되었으며, 이조 정랑이 되었다. 1625년(인조 3) 암행어사로서 영남을 다녀왔고, 사간을 거쳐 성균관의 사예와 응교를 역임하였다. 1626년(인조 4) 호패 어사로서 영남과 호남을 다녀왔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호가하여 강도(江都)로 들어갔다가 돌아와 동부승지가 되었고 다시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다. 1628년(인조 6) 대사성이 되었고, 1629년(인조 7) 이조 참의가 되었다가 가을에 부여 백마강 가에 정거(定居)하였다. 1630년(인조 8) 청주 목사가 되었으며, 다음 해 부제학이 되었다가 어머니의 병환을 들어 사직하고 부여로 내려왔다. 1633년(인조 11) 전라도 관찰사를 역임하였고, 다음 해 다시 부제학이 되었으나 사직하고 부여로 내려왔다.
1636년(인조 14) 봄 우승지로서 입대(入對)하여 시사(時事)를 진달하였고,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모시고 남한산성에 피란하였다. 1637년(인조 15)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고, 이듬해 동지중추부사로서 상소하여 어유 산성의 수축을 건의하였으며 부제학, 대사헌, 우승지를 거쳤다. 1639년(인조 17) 다시 부제학 겸 대사성이 되었다가 곧바로 이조 참판이 되었다. 그해 말 형조 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어머니의 병환으로 사직하였다. 1640년(인조 18) 모친상을 당하여 삼년상을 치렀다.
1642년(인조 20) 예조 판서와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그해 12월 신익성(申翊聖), 이명한(李明漢) 등과 함께 청나라로 잡혀 가 심양(瀋陽)에 구류되었다. 다음 해 3월 환국하여 부여로 돌아갔다가 대사헌에 임명되었고, 다시 우의정이 되었다. 1644년(인조 22) 심양에 사신으로 갔다가 다시 구류되었다. 다음 해 소헌 세자를 모시고 돌아와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1646년(인조 24) 세자빈인 강빈(姜嬪)의 사사(賜死)를 반대하다가 문외출송 당하고 진도로 유배되어 위리안치 되었다. 1648년(인조 26) 삼수(三水)로 이배(移配)되었고, 다시 아산(牙山)으로 양이(量移)되었다.
1649년(효종 즉위년) 1월 풀려나 3월에 영의정에 임명되었으나 다음 해 청나라의 압력으로 영의정에서 물러났다. 1653년(효종 4) 영중추부사로서 인재를 천거하였으며, 소명(召命)에 응해 만언차(萬言箚)를 올리기도 하였다. 1654년(효종 5) 겨울, 청나라 사신이 다시 와서 문제 삼자 물러나 충주 전가(田家)로 피하였다. 1655년(효종 6)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학문과 저술]
시문에 능하고 글씨에도 뛰어났다. 저서로 『백강집(白江集)』이 있는데, 1684년(숙종 10) 아들 이민서와 손자 이사명(李師命)이 간행하였다.
[묘소]
묘는 처음에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월롱산에 있었다가 1678년(숙종 4) 경기도 포천시 내촌면 음현리 산28번지 선산으로 이장하였다. 첫째 부인 해평 윤씨 묘의 위쪽에 있다.
[상훈과 추모]
신도비명(神道碑銘)은 송시열(宋時烈)이 찬하고, 심익현(沈益顯)이 글씨를 썼으며, 김만중(金萬重)이 전액을 하였다. 묘표(墓表)는 손자 이이명(李頤命)이 찬하였다. 묘와 신도비는 포천시 향토 유적 제8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부여의 부산 서원(浮山書院), 진도의 봉암사(鳳巖祠), 흥덕의 동산 서원(東山書院)에 제향되었다. 모두 1868년(고종 5)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는데, 부산 서원은 최근 복원되어 다시 배향하고 있다.
1631년(인조 9) 청주 목사 재임 시 선정을 기리는 공덕비가 충청북도 청주시 중앙 공원에 남아 있다. 1683년(숙종 9) 문정(文貞)이라 시호가 내려졌다.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진변리에 있는 대재각(大哉閣)은 이경여가 낙향하여 머물던 곳에 1700년(숙종 26) 이이명이 세운 누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