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0010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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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好閔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포천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장필기 |
[정의]
조선 후기 포천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효언(孝彦), 호는 오봉(五峯)·남곽(南郭)·수와(睡窩). 증조할아버지는 호조 판서 적개 좌리공신 연안군(延安君) 이숙기(李淑琦)이고, 할아버지는 홍문관 수찬 이세범(李世範)이다. 아버지는 이천 현감 이국주(李國柱)이다. 어머니는 사직 박여(朴旅)의 딸인 정경부인 비안 박씨(比安朴氏)이다.
[활동 사항]
이호민(李好閔)[1553~1634]은 1579년(선조 12) 진사가 되고, 1584년(선조 17)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85년(선조 18) 사관으로 발탁되어 응교·전한을 역임하였다. 1592년(선조 25) 이조좌랑으로 임진왜란을 만나 의주까지 왕을 호종하였고, 명나라에 지원을 요청하여 이여송(李如松)이 이끄는 명나라 군대를 끌어들이는 데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상호군(上護軍)·행사직(行司直)을 거쳐 1595년(선조 28) 부제학으로 명나라와의 외교 문서 초안을 전담하였다.
1596년(선조 29) 참찬관을 지내고, 1599년(선조 32) 동지중추부사가 되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01년(선조 34) 예조판서로 인성 왕후(仁聖王后)의 지문(誌文)을 다시 썼다. 대제학·좌찬성을 지낸 뒤 1604년(선조 37) 호성공신 2등으로 연릉군(延陵君)에 봉해졌다. 그 뒤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가 되어 부원군에 봉해졌다. 1608년(선조 41) 선조가 죽자 영창 대군(永昌大君)의 즉위를 반대하고 적서의 구별 없이 장자를 옹립하여야 한다는 입장론(立長論)을 주장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고부청시승습사(告訃請諡承襲使)로 명나라에 가서 입장론을 내세웠다. 광해군이 공을 세운 것에 대하여 포상하려 하자 「고부시공로사차(告訃時功勞辭箚)」를 올려 사양하였다. 1612년(광해군 4) 김직재(金直哉)의 옥사에 연루되었고, 1614년(광해군 6) 정온(鄭蘊) 등이 영창 대군 살해에 대해 항의하다가 귀양가게 되자 이들의 방면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1615년(광해군 7) 정인홍(鄭仁弘) 등의 원찬론(遠竄論)에 반대하여 7년간 교외에서 대죄(待罪)[죄인이 처벌을 기다림]하였다. 인조반정 후 구신(舊臣)으로 우대 받았다.
[학문과 저술]
이호민은 문장에 뛰어났는데, 그가 지은 교서(敎書)의 내용이 간절하여 보는 이의 감동을 자아냈다고 한다. 그러나 문장보다는 시에 뛰어났다는 평을 듣기도 하였다. 왜군을 피해 의주에 있을 때 적의 수중에 있던 한성을 3도 군사가 일제히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지은 시 「용만행재 하 삼도 병진 공한성(龍灣行在下三道兵進攻漢城)」이 널리 회자되었다. 저서로 『오봉집(五峰集)』 16권이 있다.
[묘소]
묘는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신복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죽은 뒤에 청백리에 올랐다.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경상북도 김천시 지례(知禮)의 도동서원(道東書院)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