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0010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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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廣成 |
이칭/별칭 | 수백(壽伯), 제곡(濟谷)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포천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변은숙 |
[정의]
조선 후기 포천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수백(壽伯), 호는 제곡(濟谷). 증조할아버지는 정복겸(鄭福謙)이고, 할아버지는 정유길(鄭惟吉)이다. 아버지는 좌의정 정창연(鄭昌衍)이며, 어머니는 한세건(韓世建)의 딸이다. 동생은 참판을 지낸 정광경(鄭廣敬)이고, 아들은 영의정을 지낸 정태화(鄭太和)이다.
[활동 사항]
정광성(鄭廣成)[1576~1654]은 1601년(선조 34)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으며, 1603년(선조 36)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05년(선조 38) 이후 정자·수찬·교리·지평 등 주로 삼사의 현직(顯職)을 역임하였다. 1609년(광해군 1) 이조 정랑에 기용된 후 1611년(광해군 3) 사성(司成)을 제수 받았다. 1614년(광해군 6) 계축옥사(癸丑獄事)로 희생된 영창 대군(永昌大君)의 복작을 요청하였다. 이어 형조 참의에 임명되었으며, 1615년(광해군 7) 대사성·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618년(광해군 10) 인목 대비의 삭호(削號) 문제와 폐모론이 일어났을 때 아버지 정창연의 정청 불참 문제로 인하여 탄핵을 받아 황해도 관찰사로 전직되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강원도 관찰사와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한 뒤 관직에서 물러나 10여 년간 은거하였다. 1637년(인조 15) 한성 판윤에 기용되었지만 다시 물러나 과천에서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649년(효종 즉위년) 형조판서에 임명되었으며, 부호군을 거쳐 지돈령부사에 이르렀다.
[묘소]
묘는 서울시 동작구 사당동 북쪽 관악산 아래 면묘(面卯) 언덕에 있다.
[상훈과 추모]
정광성이 사망하자 임금이 조회를 열지 않고 부의(賻儀)를 보내 조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