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0010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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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之經 |
이칭/별칭 | 기은(機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포천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성환 |
출생 시기/일시 | 1586년 - 정지경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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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09년 - 정지경 사마시 합격 |
몰년 시기/일시 | 1634년 - 정지경 사망 |
묘소|단소 | 정지경 묘소 -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기지리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동래(東萊) |
대표 관직 | 파주 목사 |
[정의]
경기도 포천지역에 묘가 있는 조선 후기 문신.
[가계]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상백(常伯), 호는 기은(機隱). 증조할아버지는 정구(鄭球)이고, 할아버지는 정희등(鄭希登)이다. 아버지는 경력 정근(鄭謹)이고, 외할아버지는 참판에 추증된 유수훈(柳秀薰)이다.
[활동 사항]
정지경(鄭之經)[1586~1634]은 1609년(광해군 1)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재랑(齋郞)에 이어 사복시 주부로 승직하였다. 1616년(광해군 8)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당시는 광해군을 둘러싸고 대북파(大北派)의 정인홍(鄭仁弘)·이이첨(李爾瞻) 무리가 계축옥사(癸丑獄事)를 비롯하여 인륜 도덕에 어긋나는 난정(亂政)을 펼 때였다. 이에 정지경은 영달의 뜻을 두지 않고 늙은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하여 남평 현감을 희망하였으나, 1620년(광해군 12) 배천 군수로 발령되어 많은 치적을 올렸다. 그 공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품계를 받았다. 1621년(광해군 13) 연안 부사로 나아갔다가 1623년(인조 1) “본래 추잡하고 비루한 인물로 권문(權門)에 아부하며 살아 왔고, 전후 가자(加資)된 것도 모두 뇌물을 쓴 결과인데, 가는 곳마다 수탈을 일삼으면서 한도가 없다”는 간원의 탄핵을 받아 사임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도까지 왕을 호종하였다. 난이 끝나자 첨지중추부사 겸 오위장이 되었다. 1628년(인조 6) 천안 군수로 나아갔다가 파직되었으며, 1632년(인조 10) 파주 목사로 복직되었다. 하지만 “거칠고 교활하며 탐욕스럽고 혼탁하여 부임한 뒤에 거둬들이는 것이 법도가 없어 백성이 명을 감당해 내지 못한다.”는 사간원의 상소로 파직되었다. 이에 아들인 전 도사(都事) 정식(鄭栻)이 상소하여 억울함을 하소연하기도 하였다.
[묘소]
묘는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기지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정사 원종공신에 녹훈되고, 예조참판에 증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