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0010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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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重老 |
이칭/별칭 | 진지(鎭之), 송계거사(松溪居士)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고일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조준호 |
출생 시기/일시 | 1577년 - 이중로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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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05년 - 이중로 무과 급제 |
몰년 시기/일시 | 1624년 - 이중로 사망 |
묘소|단소 | 이중로 묘소 -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고일리 |
사당|배향지 | 청해사 -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추동리 |
사당|배향지 | 민충사 - 황해남도 봉천군 |
성격 | 무신 |
성별 | 남 |
본관 | 청해 |
대표 관직 | 오위도총부 부총관 |
[정의]
경기도 포천지역에 묘가 있는 조선 후기 무신.
[가계]
본관은 청해(靑海). 자는 진지(鎭之), 호는 송계거사(松溪居士). 개국공신 이지란(李之蘭)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이인기(李麟奇)이고, 어머니는 감찰 이경(李敬)의 딸인 전주 이씨(全州李氏), 부인은 우의정 정언신(鄭彦信)의 딸이다.
[활동 사항]
이중로(李重老)[1577~1624]는 일찍이 7세 때 어머니가 죽자 비록 어린 나이기는 하지만 빈소를 떠나지 않고 울기를 어른과 같이하였다. 1592(선조 25) 임진왜란을 당하자 온 식구가 산 속으로 들어가 피신하였다. 1605년(선조 38) 무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선전관에 임명되었으며, 1617년(광해군 9) 훈랑(訓郞)이 되었고 다음 해 주사장(舟師將)[수군장]이 되어 훈련도감에 소속된 500명의 군인과 함께 강변에 주둔하며 서해 연안을 방어하였다.
당시는 광해군이 인목 대비(仁穆大妃)를 폐위한 뒤로 국정과 민심이 혼란하였던 시기였다. 이중로는 구인후(具仁垕)·정충신(鄭忠信) 등과 만나 나라 돌아가는 사정을 한탄하며 반정을 모의하였다. 1621년(광해군 13) 이천 부사를 제수 받은 이후 이서(李曙)·신경정(申景楨)이 주체가 되어 반정의 뜻을 모으자 이에 협력하여 집회 장소인 장단(長湍)에서 모여 750명의 군사를 이끌고 창의문을 지나 궁을 장악하며 반정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이후 인조가 즉위한 후 반정에 대한 공을 인정받아 정사공신 2등에 녹훈되고 청흥군(靑興君)에 봉해졌다. 또한 반정 직후 도총부 부총관에 올라 훈련 도정을 겸임하였으며, 이듬해 포도대장이 되었다. 광해군이 폐위된 직후 강화 부윤으로 특명을 받아 귀양살이하는 광해군을 감시하였는데, 광해군이 담안에서 도망쳐 나오자 조정에 보고하였지만 사전에 막지 못한 책임을 들어 양사(兩司)의 탄핵을 받았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부도 체찰사 이시발(李時發)과 함께 황해 방어사로서 반란군을 저지하는 책임을 맡았다. 예성강 상류인 마탄(馬灘)에서 여울물을 지켜 적을 막으려는 싸움 준비를 하던 중, 적의 급습으로 관군이 패할 때 우방어사 이성부(李聖符)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다행히 그의 시신은 유효걸(柳孝傑)이 전복(戰服)으로 싸서 묻고 표를 해 놓았기 때문에 찾았다.
[묘소]
묘는 원래 영평현 적초리에 있었는데 훗날 지금의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고일리 남산곡(南山谷)으로 이장하였다.
[상훈과 추모]
이중로가 전사하였다는 소식에 인조가 크게 애도를 표하며 병조판서로 추증하였다. 김천[현 황해남도 봉천군]의 민충사(愍忠祠)와 포천 창수면 추동리 청해사(淸海祠)에 배향하였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신도비문은 용주(龍洲) 조경(趙絅)이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