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0010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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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許溟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화대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진호 |
출생 시기/일시 | 1755년 - 허명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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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782년 - 허명 무과 급제 |
몰년 시기/일시 | 1858년 - 허명 사망 |
묘소|단소 | 허명 묘소 -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화대리 |
청정비 | 허명 휼민 청정비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도남동 707-1 |
성격 | 무신 |
성별 | 남 |
본관 | 양천(陽川) |
대표 관직 | 좌포도대장 |
[정의]
경기도 포천지역에 묘가 있는 조선 후기 무신.
[가계]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치종(稚宗). 할아버지는 부총관 허류(許瑬)이고 아버지는 경상 좌도 병마절도사 허칙(許侙)이다. 부인은 금위영장 이후일(李后一)의 딸이다.
[활동 사항]
허명(許溟)[1755~1858]은 1782년(정조 6) 무과에 급제하여 1787년(정조 11) 광양 현감, 1795년(정조 19) 장흥 부사를 거쳐 1814년(순조 14) 제주 목사를 지냈다. 1817년(순조 17) 황해도 수군절도사, 함경북도 절도사를 지냈으며, 1823년(순조 23) 삼도 통제사에 올랐다가 곧 황해도 병마절도사로 옮겼고, 1826년(순조 26) 평안도 병마절도사에 올랐다.
광양 현감 시절 호남 암행어사 심진현(沈晉賢)의 복명(復命)[명령을 받고 일을 처리한 사람이 그 결과를 보고함]에 의하면, “광양 현감 허명은 사람이 원래 사리에 분명하고 정사 또한 부지런합니다. 나이가 젊기 때문에 앞길을 아까워하고, 읍이 잔폐하기 때문에 정성과 힘을 다하였습니다. 공무를 봉행하는 도리와 백성을 다스리는 방법에 있어서는 흠이 없기야 하겠습니까. 그러나 진정(賑政)의 경우는 가을부터 준비하여 도리를 다하지 않음이 없었고, 가솔을 데려오지 않고 아료(衙料)[관아의 운영비]를 끊었으며, 또 자기 집에서 가져온 1,000민(緡)의 돈을 고마조(雇馬租)와 바꾸어 자비곡(自備穀)의 밑천을 삼았습니다. 분진(分賑)할 때에 곡물을 정실하고 기준에 맞게 하였고, 장(醬)과 죽(粥)을 풍족하게 하였습니다. 유리걸식(流離乞食)하는 이들을 머물게 하는 장소 또한 모두 직접 살펴서 더욱 후하게 하도록 힘썼으니, 하는 일마다 정성을 다한 것이 지극히 가상합니다. 다만 성품이 유약하고 솜씨가 아직 서툴므로 앞으로 점점 익숙해지면 공효를 이룰 수 있을 것이고, 더욱 힘써야 할 것은 너무 가혹한 점을 고치는 것입니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제주 목사로 재임할 때는 해녀들이 미역을 캐는 데 따른 수세(水稅)를 없애고 돈 900냥을 준비하여 공용에 보태 쓰도록 하였다. 또한 화재가 발생하여 인명과 재산 등 많은 피해가 있었는데, 이를 조정에 보고하여 감세 및 지원을 받았다는 기록도 보인다. 1년 1개월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제주 목사 재임 시 행정을 청렴하게 실시하였으나 병으로 1815년(순조 15) 이임하였다.
[묘소]
묘는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화대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제주 도민들이 허명의 덕을 칭송하여 세운 허명 휼민 청정비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도남동 707-1번지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