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0011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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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兪晦一 |
분야 |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유동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명우 |
출생 시기/일시 | 1642년 - 유회일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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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1690년 - 유회일 아버지 사망 |
몰년 시기/일시 | 1691년 - 유회일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729년 - 유회일 정려 |
추모 시기/일시 | 1748년 - 유회일 유허비 건립 |
출생지 | 유회일 출생지 -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유동리 용호동 |
거주|이주지 | 유회일 은거지 - 강원도 속초시 대포동 물치리 |
묘소|단소 | 유회일 묘 -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유동리 용호동 |
사당|배향지 | 향현사 터 - 강원도 속초시 대포동 |
비 | 물재 유 선생 유허비 - 강원도 속초시 대포동 비석 공원 |
성격 | 효자 |
성별 | 남 |
본관 | 창원(昌原) |
[정의]
조선 후기 포천 출신의 효자.
[가계]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현숙(顯叔), 호는 물재(勿齋). 숙종 때 개성 부사를 지낸 유창(兪瑒)의 둘째아들이다.
[활동 사항]
유회일(兪晦一)[1642~1691]은 지금의 포천시 일동면 유동리 용호동에서 태어났다. 숙종 때 대학자이며 정치가인 박세채(朴世采)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으며, 학덕이 매우 높았다고 한다. 강원도 양양 도호부 강현면 물치리(勿淄里)[현재 속초시 대포동 물치리]에 은거하였는데, 조정에서 빙고 별검·의금부 낭청 등에 임명하였지만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부모가 연로해지면서 포천으로 돌아와 지극정성으로 받들었다. 42세 때 어머니가 위독하자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피를 흘려 넣어 드리느라 기절하기도 하였다. 1690년(숙종 16) 아버지 유창이 세상을 떠나자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시묘를 하던 중 3개월 만에 죽었다.
[묘소]
묘는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유동리 용호동에 있으며, 부인 성주 이씨와 합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1729년(영조 5)에 효자 정려가 내려졌지만 6·25 전쟁 때 소실되었다. 한편, 유회일이 은거하던 집터에 향현사(鄕賢祠)가 세워졌으나 철훼되고, 1748년(영조 24)에 물재 유 선생 유허비(勿齋兪先生有墟碑)가 건립되었다. 비문은 예조판서 조관빈(趙觀彬)이 짓고, 글씨는 강원도 관찰사 홍봉조(洪鳳祚)가 썼다. 이후 유허비는 속초시의 주택 개발 및 관광 개발 정책으로 인해 대포동 파출소 옆 비석 공원으로 옮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