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0011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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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天極 |
분야 |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성환 |
[정의]
조선 후기 포천 출신의 효자.
[가계]
본관은 수성. 형은 효자 최천주(崔天柱)이고, 최천후(崔天後)의 사촌 형이다. 부인은 광주(廣州) 김씨이다. 고려 시대에 수성백(隋城伯)에 봉해진 최영규(崔永奎)의 후손이다. 『포천 군지』에 수록된 효자 최천후(崔天候)는 사촌 동생 최천후(崔天後)와 같은 인물로 추측된다.
[활동 사항]
최천극(崔天極)[1602~1636]은 포천의 읍치 남쪽 20리 떨어진 화산(花山) 석포촌에서 세거하였다. 효성과 우애는 하늘로부터 받았고, 용기는 보통사람을 뛰어넘었으며, 아버지를 섬기는 데 효성을 다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에 관내의 수원산(水源山)으로 피난하였을 때 칼로 ,청나라 병사 백여 인을 죽이자 그들은 최천극을 장사로 불렀다. 청나라 병사들은 최천극을 찾으려고 산을 에워싸고 수색하였으나 사로잡지 못하고, 최천극의 아버지를 인질로 잡았다. 이에 최천극이 청군의 진으로 들어가자, 청나라 병사가 그 용기를 가상하게 여겨 아버지를 풀어주고 대신 최천극을 청나라로 압송하였다. 그런데 청나라로 가던 중에 사람들에게 “정녕 조선의 귀신이 될지언정 오랑캐의 신하가 될 수는 없다.”고 말하며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었다. 이때 나이 35세였다. 형인 최천주(崔天柱)와 최천후(崔天後) 역시 효행으로 이름이 났다.
[묘소]
묘는 석문(石門)의 선영에 있다.
[상훈과 추모]
병자호란이 끝난 후 조정에서 정려를 내리고 한성부 참군에 증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