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0011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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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申榮熙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포천시 내촌면 내리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이계형 |
추모 시기/일시 | 1977년 - 신영희 대통령 표창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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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시기/일시 | 1991년 - 신영희 건국 훈장 애국장 추서 |
몰년 시기/일시 | 1919년 03월 19일 - 신영희 사망 |
출생 시기/일시 | 1891년 7월 15일 - 신영희 출생 |
출생지 | 신영희 출생지 - 경기도 포천시 내촌면 내리 |
거주|이주지 | 신영희 이주지 -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 답내리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 강점기 경기도 포천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신영희(申榮熙)[1891~1919]는 1891년 7월 15일 경기도 포천군 내촌면 내리[현 경기도 포천시 내촌면 내리]에서 태어났다. 이후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 답내리로 이주하여 서당 훈장을 하던 중 3·1 운동에 참여하였다. 일제가 우리나라 국권을 침탈하자 기회를 보아 독립운동을 할 결심을 하고 있던 중 거족적인 3·1 운동이 일어나자, 1919년 3월 18일 밤 이달용(李達鎔) 등이 주동한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 마석 모루[磨石隅]의 독립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에서는 3월 16일 만세 운동을 일으키기로 하였는데, 사전에 일제에 발각되어 이를 주도하였던 이재하(李載夏)·이승보(李承輔)·이택주(李澤周) 등이 잡혀 한 때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신영희는 거사일인 3월 18일 1,0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마석 모루에 있던 헌병주재소 앞에서, 체포된 이재하 등의 석방을 요구하며 만세 시위를 전개하던 중, 일본 헌병과 충돌하였다. 이 때 일본 헌병의 발포로 신영희를 비롯하여 4명이 현장에서 순국하였고, 6명이 부상하였다. 1919년 3월 19일 28세에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77년 대통령 표창, 1991년 건국 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