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0019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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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與永祚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경기도 포천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엄익성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833년 - 「여영조」 최익현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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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몰년 시기/일시 | 1906년 - 「여영조」 저자 최익현 사망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909년 - 「여영조」 『면암집』 초간 |
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 1905년 05월 06일 - 「여영조」 최익현 창작 |
배경 지역 | 포천 본가 -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가채리 |
성격 | 편지 |
작가 | 최익현 |
[정의]
1905년 최익현이 포천 본가에 있는 큰아들 최영조에게 보낸 편지.
[개설]
「여영조(與永祚)」는 조선 후기의 문신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1833~1906]이 1905년 5월 6일에 경기도 포천의 본가[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가채리]에 있는 큰아들 최영조(崔永祚)에게 쓴 편지이다.
[내용]
영조(永祚)에게 보냄 - 을사년[1905] 5월 6일
떠나간 뒤에 소식이 없으니 우울함을 말할 수 없다. 동릉(東陵)에 가서 직숙(直宿)하는 것은 동료들과 언약이 있는 줄 안다. 일차 입직하러 가는 것은 면할 수 없을 것이나, 이제부터는 칼로 베듯이 판단할 줄 알아야 될 것이다. 그러하지 못하면 조그마한 벼슬을 버리기 아까워하는 것이 입신양명하는 데에 조금도 도움이 없고 귀에 거슬리는 말은 자기 스스로 책임질 것이니, 난감한 일이 아니겠느냐. 또 내 처지는 잡혀갔다가 돌아온 뒤로 스스로 인책한다는 말 한마디도 없어서는 안 될 것이고, 자질(子姪)로서도 말단의 수습은 해야 될 터인데, 아직도 아무런 조처가 없는 것은 크게 적절한 도리가 아니다. …… 포천(抱川) 소식은 어떠하며 운선(雲善)의 대소가는 모두 어떠하냐?
[與永祚 乙巳五月六日 去後無聞 紆欝何言 東陵就直知與僚友 有相約者存 似不免一次持被 而自玆以後 則能判一刀兩段之義否 不然則鷄肋之戀毫髮 無益於立身田地 而逆耳之論 則吾自當之 得非難堪者耶 且吾之處地 押還以後 不可無一語自引 而在子侄 收拾末梢之地 尙此寂然者 大非其宜 …… 抱川信息及雲善諸節 幷若何云耶].
[특징]
『면암집(勉菴集)』 중 권(卷) 15는 집안의 맏형 최승현(崔升鉉) 등 친척 19인에게 보낸 편지로 구성되었다. 그중에서 「여영조」는 최익현이 큰아들 최영조에게 「여장자영조(與長子永祚)」, 「여영조(與永祚)」, 「답영조(答永祚)」 등의 제목으로 보낸 총 23통의 편지 중 하나이다. 최익현은 1905년 2월 6일 일본 헌병대에게 체포되었다가 2월 8일 포천의 본가로 압송되고, 2월 18일 다시 체포되었다가 20일 정산(定山)의 시골집으로 압송되는데, 이와 연계된 내용이다.